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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했던 게 무색하게, 아무 일 없었다. 나는 이틀 정도는 서지학의 눈치를 봤지만, 시간이 지나자 도리어 담대해져 할 말을 다 하고 지냈다. 우리는 늘 그랬듯, 평소처럼 연습하고 각자의 일상을 보냈다. 이번 대회가 끝났을 뿐, 게임단이 해체된 게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마블이 준비해야 할 정규 리그는 아직 1년가량이나 남아있고, 팀원들이 모여서 할 일...
나는 밤 내내, 대진표가 잘못된 것이길 기대해 보았다. 기대는 대개 허튼 짓이다. 기대한 만큼 실망하게 되니까. 대기 로비의 반대편에는, 룰스의 팀원들이 자리해 있었다. 세계 2위의 위용이 그들이 걸친 유니폼 스킨으로부터 느껴졌다. 반대로 우리 팀원들은 모두 블라인드 스킨을 착용한 상태라,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외국인들의 탐색하는 눈길이 꽂힌다. 외국인 ...
백윤명은 이야기가 끝나자, 나를 더 붙잡지 않고 바로 돌려보내주었다. 예상치 못한 조기퇴근에, 할 게 없었다. 나는 비도리움에 들어가서 마침 방송중인 한나의 채널을 선택해 들어갔다. 한나는 일주일에 최소 3번은 방송을 했다. 처음 방송할 때부터 지금까지 제목은 일관적이었다. [생방송 맞음. 거짓말 아님. 생존 모드 n일차]. 건조하다 못해, 다소 무성의하게...
백윤명이 파티 초대를 한다. 나는 불안감으로 두근대는 마음으로 수락한다. 내가 걱정하는 사이, 어느새 백윤명의 로비로 이동해 있었다. 괜스레 목을 쓸어본다. 서지학의 로비에서만 모이다 보니, 백윤명의 로비에 온 건 처음이었다. 로비는 서지학의 로비처럼 돈을 많이 들인 티가 났다. 확장에만 얼마를 들인 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가운데에는 분수가 있고, 그...
녹즙이 튀기는 연습을 한 지 닷새가 흐르고, 대회가 시작되었다. 소규모의 대회지만, 주최측이 마음 먹고 투자를 했는지, 대회장 맵부터 초대가수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대회장 맵에서는 오프닝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대회 참가자부터 관중들, 관계자들이 스포츠 경기장과 같은 돔 형태의 맵 관중석에 빽빽이 모였다. 사람들은 대회 주최 기업의 약력을 흘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신기하게도 꿈 속인데, 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가 너무 고마워서였을까, 유치원에서 막 친구가 된 때의 영화와 나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고 있었다. ‘영화야, 영화야, 너 왜 나랑 친구 해?’ 그 시기의 아이들이면 으레 하는 질문이었다. ‘예뻐서.’ ‘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으응.’ 보통 친구 관계라는 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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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를 챙기고 연습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지 며칠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영화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나를 반기는 건 기술의 발전으로 조금 더 다정한 톤을 가지게 된 전자 목소리였다. 며칠에 걸친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저녁에 연락이 닿았다. 영화는 감사하게도 나를 태우러 사람을 보낼 것이니 숙소 근처의 정류장까지 나오라고 말했다. 집에 갈 수 있...
팔은 안으로 굽는다. 백윤명은 내 팀원이다. 나는 전후사정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대치하는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백윤명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아쳤다.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 속에서, 억눌린 열이 꿈틀대는 것 같은 어투였다. 그러면서도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했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자리에 ...
서지학과 운동을 한 지 이틀이 지났다. 인생은 공평한 척하지만, 출발선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서지학과 나의 출발선은 위아래로는 약 한뼘가량이었고, 옆으로도 그만큼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빌어먹을 후레양키놈은 본인과 나의 하드웨어 차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 열차 시간이 다 되었으니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들은 택시기사처럼 끝을 모...
시야가 밝아지면서 눈앞에 팀원들이 보인다. 모두 랜덤 위치에서 시작하는 생존 모드나 문명 모드, 진영 로비에서 대기하는 요새 모드와는 달리, 학살 모드에서는 모든 팀원이 지정된 장소에 함께 소환되며 시작한다. 시작 1분 후부터 킬이 가능해지는 학살 모드에서 제작군을 보호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일단 나는 하던 대로 제작군 스킬트리를 올릴게. 이번에 이것저...
궁금한 것은 참으면 병이 되는 법이다. 내 눈에 띄는 곳에 없을수록 좋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나타나면 더 불쾌한 그런 존재에 대해 물어보기로 한다. “지학이 형은 어디 갔어요?” 세 명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경악한 표정을 한 사람 셋이 나를 뚫어져라 보는 건 생경한 공포를 자아낸다. 갓 구운 케이크 시트 위에 크림 대신 마요네즈를 짜도 저...
팀원들이 내 주변에서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누운 이 장소는 이미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 되고 만 것 같다. 등을 배기게 하는 고급 대리석 위로, 어느 시골 동네의 큰 나무 아래 있던 마루가 아른거렸다. 어르신들이 잔뜩 모여서 여가와 사교와 숙식을 모두 해결하던 만능의 마루. 담소, 화투, 바둑, 새참, 취침까지 모두 한 자리에서 해결하던 그 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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