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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면 좋겠다." 엄마는 '여동생에게는 말하지마. 부담 갖는다.'란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아이의 성별이 밝혀진 이후에는 엄마의 말이 또 바뀌었다. "아들이라 다행이다." 평소보다 퇴근이 늦은 적막한 도로 위에서 엄마가 툭하고 내뱉는다. 대부분의 가게가 다 닫은, 늦은 시간이었기에 나는 엄마의 초과근무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딸이면 좋겠다며?...
나는 왜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까. 그건 분명 내가 이기적이고 나약해서, 성숙하지 못하고 못돼빠져서 그런 거겠지. 긴 시간 끝에 내가 바라는 그런 사람, 내 바람들을 다 알아주고 말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고 들어 주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알아냈다. 모든 사람은 다 각자의 삶, 각자의 방식이 있고 절대 그 누구와도 ...
내 지금을 다 가져가. 내가 여기 있을 수 없어 뒤로 가도록. 저 뒤로 갔다 다시 열심히 왔을 때 여기라 한들, 야. 그냥 다 가져가서 너와 나를 우리로. 우리일 때로 가서 마음껏 누리기로. 돌릴게, 내가 다 돌려서 다 돌아서 너에게로 다시, 다시. 우리 같이 달빛 아래서 웃자니까. 환히 웃는 달과 함께 웃음을, 미소를, 키스를, 지금을. 그때를 지금으로 ...
9일차 아침에 일어났다. 밤에 한번도 안 깨고 잠을 자서 상쾌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왜... 중간에 깬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내 기억엔 없어도 몇번 깼었나보다. 아무튼 비몽사몽 아침밥을 대충 먹고 양치하고 세수하고 6000보를 걸었고 플랭크를 1분 깔짝거렸다. 그리고 기억 삭제. 다른 환자분들이랑 간호사 선생님이랑 보드게임도...
처음 당뇨를 진단받던 때 나는 열 넷이었다. 췌장 세포가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뇨에 걸린 사람의 상태는 비슷하거나 더 나빠지기만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픈 것이 어떤 정확한 의미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방학에 나는 입원했다. 어중간하게 췌장 기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생활 습관을 빡세게 관리해 나빠지는 걸 막아...
필요에 따라 적절한 단어를 골라서 쓰는 일로 돈을 버는 사람, 즉, 작가나 번역가 같은 사람은 언어 생활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해왔다. 나 자신도 그럴 뿐더러 주변에서 언어 관련 일을 하는 친구들도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쓰는 연장의 모양과 기능이 자꾸 바뀌는 것을 반기는 기술자는 적을 테니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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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다가 조퇴하고 병원으로 걸어갔다. 병원이 직장과 가까워서 다행이다. 시내버스를 타는 수고로움이 조금 덜어졌다. 불편한 점이라면 이제 매주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때마다 무슨 이유로 어느 병원에 가는지 이야기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 상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유연근무제로 일찍 퇴근하고 왔냐고 물어보셨다. 우리는 유연근무제 안한다고 하니까 어떻게 그럴 ...
미완성 나는 어릴 적, 시골 살던 적당히 통통한 여자아이였다. 이 동네는 뒷편에 산골이 있고, 넓디 넓은 논, 또랑, 포도밭, 몇몇의 상가가 있다. 집들은 시멘트 집이다. 참 우리 집은 다른 집과는 다르게 한옥이었다. 또래 아이들은 온통 남자애들이었는데 늘 다 같이 놀러다녔다. 내가 거기에서 가장 어른들을 가장 잘 다뤘고 또 당돌하고 힘도 말빨도 셌기 때문...
씨이발 농협 이 새끼들은 명세서 수령 방법 하나 바꾸는 것도 온 지랄을 해놨다. 몇 년을 미뤄왔던 오랜 숙원인 '명세서 수령 밥법'을 오늘 드디어 바꾸려 했다. 매달 우편함에 꽂히는 카드 명세서를 보며 엄마가 이젠 휴대폰으로 돌릴 때도 되지 않았냐며, 걔네들도 굳이 종이로 보내기 귀찮을 텐데 바꾸라고 한 소리 했다. 말로만 알겠다 했던 걸 오늘 날 잡아 바...
안녕하세요. 셀프(Self)입니다. 배회하는 영(0)에 이름으로는 셀프(Self)에 무지성 talk 외전작입니다. * 마지막 편에 대한 숫자는 미정. 이번에 작성하는 이야기는 학이가 표현하는 소재, 어쩌면 그 존재를 마주하게 된 시작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회하는 영(0)에 이름으로. ㄴ (0) 영에서 영으로 끝나는 이야기 ㄴ (11) 우리가 작성한 질문...
중고의 미학 약한 진동과 함께 휴대폰의 배너에 알림이 떴다. 설정해둔 키워드로 중고 물건이 올라온 것이다. 사려고 하는 건 중고 노트북. 워낙 유명한 브랜드라서 자주자주 알람이 온다. 오 괜찮은... 가? 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순간 그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채팅으로 줄을 섰다. 아이고, 이미 늦어버렸다. 거래 예정 딱지가 붙는다. 괜찮은 물건이었나보다, ...
그간 이래서 그렇게 못 일어났구나 싶을 정도로 잠을 줄이는 게 힘든데,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친 와중에도 뉴스를 보니 갑자기 단전으로부터 에너지가 솟아올라 도대체 언제 지쳤었지 싶은 것이다. 분노가 이렇게 무섭다. '저놈들을 다 죽여버릴것이다' 는 아주 강력한 희망이자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사실 작년에도 몇달이나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분노에 기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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