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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서(戀書), 첫 번째. 민, 이곳은 날이 찹니다. 지금쯤 수도에는 봄이 왔겠군요. 연락이 뜸하여 혹여나 서운했다면 미안합니다. 꽃이 피고 있을 텐데 그대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나는 무사히 보헌국(報獻國)에 도착했습니다. 보헌국은 작은 국가지만 백성들의 몸가짐이 바르고 재물을 낭비하는 법 없이 소박하며 성현의 말씀을 공경하여 어느 곳이든 불화가 없습니...
그곳은 세상의 끝 같았다. 뜨거운 모래와 따가운 바람, 그리고 죽어 있는 것들만으로 가득 찬 끝없이 붉기만 한 공간은 온 세상의 다툼과 원망들을 모조리 가져다 풀어 두고도 남을 만큼 아득하고도 넓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구릉처럼 넓게 펼쳐진 무덤처럼 둥그런 모래 산만이 모험가들을 굽어볼 뿐. 그들은 마치 환상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
다섯 번째의 겨울이 날카로운 이를 거두고 총총히 물러났다. 봄이 눈을 뜸과 동시에 제비가 돌아와 궐의 처마에 집을 짓고 이곳저곳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꽃씨를 뿌려 주었다. 그들의 날갯짓마다 꽃이 피어나 겨우내 하얗게 비어있던 가지와 외로운 땅 위를 촘촘히 채웠다. 높은 담장 너머로 얕은 푸른색의 구릉과 수양버들로 가득 찬 산이 보였다. 뒤뜰의 작은 연못에선 ...
“무엇들 하느냐! 곧 감찰 마마님께서 들어오실 텐데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 해?” 외궁 최고참 궁녀 수나(壽娜)가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옷을 다리고 동정을 꿰매고 천을 마름질하는 등의 일에 바쁜 궁녀들을 다그쳤다. 딱딱, 내리치는 날카로운 죽비 소리가 몹시도 귀에 거슬렸다. 하얀 눈이 이 곳 저곳에 쌓인 한겨울이었지만 뜨거운 인두를 들고 있느라 땀이 뻘뻘 ...
검붉은 피 냄새를 품은 커다란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한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암흑의 밤이 성큼 찾아왔다. 눈을 감고 있는가, 뜨고 있는가. 거친 손등으로 여러 번 자신의 눈을 비벼 보았지만 별 한 점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밤이었다. 턱 끝을 옥죄어 오는 숨 막히도록 짙은 정적을 그 누구도 깨려 하지 않았다. 문득 오스스 소름이 돋아 몸을 둥그렇게 웅크...
‘이것 먹어보려느냐.’ 헉, 이것은? 온왕 전하가 알록달록한 오색 설탕이 묻은 윤기 나는 강정을 한 사발 들고 태민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먹고 입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황자 사저에 들어오게 된 지가 6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다 정해진 진지 외의 군것은 일절 먹지 않는 주인 나리의 식성 덕분에 과자나 사탕 ...
<괴이현상 실종자수색연합 수색대원 행동지침> <주의사항> *해당 문서는 언제나 수색연합 본부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만약 이외의 장소에서 본
*단수(斷袖)의 속편 1화이므로 단수를 먼저 읽으시면 좋습니다.* “네 이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도둑새끼 잡아라!” 성공이다! 푸줏간에서 돼지고기를 사던 한 늙은이를 힘껏 밀쳐내고, 그녀가 휘청거리는 틈을 타 연잎에 정성스레 겹겹이 싼 돼지고기 덩어리를 잽싸게 낚아챈 작은 소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뛰었다. 하도 기우고 기워 이제는 본연의...
“너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으냐?” 넌지시 묻는 그의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진저리가 쳐지도록 농도 짙은 정사를 치르고 난 후에 내리는 질문 치고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시시하다. “왜 그리 살래살래 고개를 젓느냐?” “…….” “말해 보아라. 태민아.” “전…, 성도 없고, 가문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천한 사내놈인데 어찌 황후를 생각할 수가...
'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 인기 많고 , 심지어 혼자서 이루어 낸 높은 작위 , 멋진 여공작 , 전장에서는 엄청난 카리스마 , 대회의에서는 누구보다 국민들을 사랑하고 , 여자라고 기죽지 않는 . ' 아무리 수많은 칭찬을 해도 모자란 완벽한 사람 , 사교계 핵인싸인 김민니와 , ' 음악밖에 모르는 , 황족의 결혼을 거절한 , 대화하기 힘든 , 차가운 사...
초여름의 흙비는 오래도록 내리고 있었다. 정수리와 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물방울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의 어깨 위에 닿자마자 옅은 김을 내뿜으며 증발하고 있다. 아침나절에 고이 차려 입었던 흰 비단으로 만든 무복(武服)은 피와 빗물에 젖어 너덜거렸다. 여름의 하루는 길어 땅거미가 다가오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아이는 휘청거리며 목검을 지팡이처럼...
싸늘한 바람과 함께 문간으로 들어선 소년은 황금용이 수놓인 화려한 외투 끝자락을 몇 번 털었다. 방 안에서 짙은 사향 냄새가 풍겼다. 붉은 색 초 수십 수백 개가 하나도 빠짐없이 눈을 뜨고 공간을 밝히는데 그 천박함과 무질서함에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소년은 버선발로 달려 나온 여인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누구였던가. 입은 의복이 화려하고 눈부신 것으로 ...
순금으로 만든 향로에 두어 자루의 향이 꽂혔다. 진홍빛 불꽃에 닿자마자 실처럼 가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공간을 채우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내. 세상에 온통 작약과 장미가 핀 것 같았다. 그토록 짙은 향이었다. 말로 일주일을 쉬지 않고 달려야 갈 수 있다는 머나먼 남국에서 바쳐 온 귀한 향이었다. 소녀를 여인으로 만들고, 병자를 걷게 하는 것은 물론 시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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