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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시피가 적힌 종이의 내용을 외워버릴 정도로 읽었는데도 반죽이 담긴 틀을 오븐에 넣기 전까지 엘엘프는 종이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온도까지 제대로 맞췄다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오븐 앞에서 서성이는 엘엘프의 곁으로 다가간 리젤롯테는 머리카락보다 옅은 분홍빛 입술을 움직였다. "미하엘의 걱정에 케이크가 도망가겠어요." "그건 곤란해." 엘엘프가 농담조차 받...
니토크리스는 위대한 신왕의 명령으로 그의 어전에 들어섰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신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황동색 물병. 일전의 내기의 대가로 신왕이 영웅왕에게서 받기로 결정된 신주(神酒)였다. 마나카 스핑크스에게 병을 건네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신왕에게 질문을 올렸다. 신왕이시여, 감히 무례를 저지르나이다. 어째서 신주를 지금 받으셨...
썸타니까! 가능하지 않을가 하고... * * *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이에 얼추 추운 기색이 한풀 꺾인 모양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 끝을 베어낼 듯 매서웠던 바람이 지금은 그저 딱 기분 좋은 시원함으로 주위를 감쌌다. 아직 쌀쌀한 감이 남아있어 늘상 입던 가죽 코트를 집어들긴 했지만, 어느덧 봄 기운을 풍기기 시작한 정오의 햇볕에 코트는 빛을 발하지 못...
"허어어어." 어둠 속에서 입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실은 그렇게 추운 것도 아니면서 코끝의 추위가 가라앉을 때마다 입을 벌렸다. 체온으로 덥혀진 공기가 허공에서 뭉실거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따뜻한 사람이었나. 실없는 생각을 하던 택상은 금세 다시 시려오는 코를 훌쩍이며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 아래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묵직...
망했다. 그 세 음절과, 이리저리 엉킨 욕지거리, 묘한 쾌감과 두근거림. 이라는 충동적이고 모순적인 감정만이 그의 머리에서 맴돌았다. 싸움을 피해 도망치듯이 뛰어나와 갈 곳이 없는 그는, 때 아닌 눈을 달가워 해야할 지, 저주 해야할 지도 알 수 없었다. 흐르는 시간에 그의 속이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눈치 없는 함박눈은 파란 상록수 위에 착실히 쌓여가...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이 이렇게나 무겁게 제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건 대체 언제부터일까. 그저 재수 없는 기집애, 한 번은 콧대를 꺾어주고 싶던 얄미운 애였던 것 같은데. 자기중심적 마이웨이라 어차피 크게 타격받지도 않을테니 제 속이라도 풀리게 툭 건드려나 보자, 하는 심산이었는데 말이다. 한번이 두번이 되고, 그 두번이 또 수 없이 많은 마찰이 되고 나서...
다리가 네 개이고 머리는 둘이었으나 손은 한 쌍밖에 없는 신화 속 켄타우로스를 보았다. - 미시간 피아노 카메라타 제13회 정기연주회 힐링 음악 (09.29) - 긴 연휴를 즐기다가 무료해갈 때 즈음, 우연히 티켓 사이트를 뒤적여 보았다. 본래 콘서트, 뮤지컬을 찾아볼 의도였지만, 르네상스 교양 수업이 생각나 연주회 카테고리를 살펴보았다. 관심 두고 찾아보...
징검다리 온 마을 통을 주름잡던 그 시절의 소년은 ‘ㅎ’ 번호판을 단, 웃고 있는 어린 양들에게 알려주지 못할망정 바다를 묻고 되묻는다 물질하다 마주친 해초를 쥐어짜듯이 한 손으로 손주의 손톱 사이를 꼬집다가 왼편에 일렁이는 파도를 보고서 오른편으로 핸들을 돌린다 할아버지, 저긴데 평생 밟아보지 못한 저 먼 육지 땅을 갈망하며 그 시절에 던진 소년의 부메랑...
<리퀘 주제 : 마츠리 적강> 어떤 경우 감각은 하나로 기억되지 않는다. 특별한 화학적 작용이라도 발생하는 것처럼, 두 개 혹은 서너 개 이상이 엮여야 온전한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 아카시는 처음으로 갔던 축제를 후덥지근한 단내로 기억했다. 유모가 그를 데려갔다. 아카시의 키가 유모의 무릎에도 닿지 않았기에 그녀는 아카시를 안아들고 다녔는데, ...
[형 저오늘 늦어요 먼저자요 기다리지말구 밥챙겨먹는거잊지말구요] 민호가 늦는다. 요새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은 잘 알지만, 민호가 오늘 언제 이 집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쓸쓸하다. 게임도 다 했다. 오늘은 어쩐지, 민호가 없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잘 풀리지 않아 재미가 없었다. 마우스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두면 고양이 둘이 움찔 놀라 ...
아침 먹으러 나오라는 수녀님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도영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꿈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침대 위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던 도영에게로 재민이 다가왔다. 형, 아침 먹으러 가야지. 재민의 목소리는 가라앉아있었다. 도영의 침대 매트리스를 툭툭 치며 도영을 부르는 재민이 웬일로 제노와 함께 나가지 않고 도영을 챙기나싶어 도영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려갈게...
해리는 자신이 처한 지금 이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울했다. 그 말은 단지 입버릇일 뿐, 진심이 담긴 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해리의 절박한 자기 변호에도 불구하고 드레이코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의 상황에 다다르게 된 것이다. 드레이코의 다리 사이에 앉아, 그를 죽일 듯이 노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 말이다. "포터, 고집 피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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