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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부슬비는 유난히도 오랫동안 내렸다. 적어도 은월의 기억을 더듬자면 말이다. 초가을에 접어들며 내리는 이 비는 과거의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시기적으로도, 분위기로도 충분히. 은월은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표정을 지으며 골목길을 걸었다. 바닥에는 움푹 패여 물웅덩이 몇몇이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빗방울이 튀어 그의 바지 밑단을 적셨다. 손에는 ...
어느 덧 낙엽이 물들어 가는 시기가 다가왔다. 거리에는 울긋불긋 나뭇잎을 보겠다며 구경나온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가을을 타는지 아니면 예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그 거리를 홀로 걸어가는 그의 입가엔 쓴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그의 머리 위로 툭, 하고 낙엽이 떨어졌다. 그것을 손으로 떼어내며 바라보다가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날...
나름의 불을 밝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방은 어두웠다. 주황빛을 내는 등잔 하나에 의지하기엔 방은 꽤 넓었다. 그곳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작은 발걸음 소리도 들릴 정도였다. 침묵을 뚫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않고 있어? 이러면 우리 재미없잖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목소리의 주인은 둥그런 탁자에 와서 앉았다...
지독한 꿈이었다. 단지 평화를 되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자신을 희생할 각오까지 했는데, 결국엔 남은 것은 자신뿐이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영원한 고독, 누군가가 꿈의 주인에게 내린 지독한 저주. 남자는 숨을 헐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기분 나쁜 감각이 그를 싸고돌자, 그는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제 기억에는 없는 꿈,...
정말 한 순간의 일이었다. 조용하던 상담실에서는 귀에 거슬리는 쇳소리만이 카랑카랑 울렸고, 순간적인 폭음에 귀가 멍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줄을 지어 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죄다 검은 정장 차림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마치 색이 사라진 공간에 갇힌 느낌을 주었다. 그 공간에서 퍼져 나오는 살기는 보이지 않는 검이...
때 아닌 눈이 그의 로브에 내려앉았다. 붉은 로브가 하얗게 변하고 있음에도 그는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상당량이 쌓여 땅으로 떨어질 때까지, 그저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순적이었다. 대지는 불타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흰 눈이 기적처럼 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기적이었더라면. 프리드는 입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대로 모든 것이 얼어버...
※ 주의 신체훼손, 음식에 들어간 이물질, 벌레 묘사, 위계/성별 면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직장 내 폭행 (주)개미싹의 정식 수칙서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
처음 그와 함께 길을 걷자고 하였을 때는, 결코 이런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목숨을 걸고 결전에 참여했던 동료들에게, 그리고 프리드 자신에게도 너무 가혹했으니까. ‘…눈?’ 하늘에서 내려오는 투명한 결정이 살며시 그의 볼에 내려앉았다. 순간적인 차가움에 그는 몸을 살짝 움찔했지만, 곧 그 차가움에 익숙해졌다. 검은 마...
“슬슬 때가 온 것 같군요.” 차가운 달빛이 빈 천장을 통해 그들의 거처, 가장 바닥까지 살포시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던가. 그곳에 홀로 서있는, 아니, 홀로 서있었을 터인 백발의 남자는 살짝 긴장된 모습이었다. 겉으로 티가 잘 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동안 그를 곁에서 지켜봐온 그녀라면 충분히 ...
오늘도 신수국제고등학교의 점심시간은 들썩거렸다.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는 엉뚱한 학생들 때문에 사건사고가 없는 일이 없었다. 지금 화젯거리는 전학생들의 싸움 얘기였다. 자칭 운명의 전학생이라고 우기는 학생과 알파가 시비가 붙어 일방적으로 알파가 때린 것이었다. 결국 스탄 선생님께 불려가는 바람에 베타는 점심을 혼자 먹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오즈와 이리나가 ...
ㅡ너희들은 잘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내가 아끼던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무슨 선택을 해야 했을지. 투둑- 그 곳에 선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 첫째로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의 ‘선택’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손...
“헉…!” 턱까지 차오르는 갑갑함에 거친 숨을 내쉬며, 벌떡 일어났다. 식은땀은 볼 선을 따라 흘러내렸고, 이미 등까지 축축하게 젖은 얇은 옷은 피부에 달라 붙어있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진정되지 않는 숨소리가 불안정하게 방안을 가득 메웠다. 언제부터 이랬던 걸까. 도대체 이 꿈은 언제 끝날까. 벌써 꿈을 꾸기 ...
어두워졌어야 할 밤이거늘, 여전히 시간의 신전만큼은 붉은 빛으로 가능하다. 주변은 이미 불길에 휩싸였고, 그곳에 집합한 이들은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착잡한 기류가 흐르고,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임무를 도맡아 하였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며 어딘가로 향하는 금발의 남성이 보인다. 아리아 황제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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