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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는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서 창밖을 쳐다봤다.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앉아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탁 트여있어서 꽤 좋았다. 아래로 시선을 내려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뒤에서 재경이 커피를 들고 왔다. 예지에게 커피잔 하나를 내밀면서 재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자리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언제 온 거야?” 예지는 커피를 호...
"어, 아, 안녕." 언제나 딱딱한 말투를 하는 옛 동료에게, 나 역시 엉거주춤 일어서서 딱딱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세상에 그렇게 어색한 환영이란 앞으로 백 년 정도는 찾기 힘들 테지. 친구의 낚시 조끼가 형형하게 빛났다. "요 근처를 지나는 중이었다. 정말로 우연히. 그런데 추억이 깃든 이 건물에 오늘도 밤늦도록 남아서는 아까운 전깃불을 켜고 업무를 하는...
"하아." 달아오른 숨이 얼굴을 스쳤다. "좀 가만히." 나는 핀잔을 놓았다. 딱 캐비닛 틈과 문틈을 비집고 나가지 않을 만큼만 속삭이는 소리로. "하아앗…."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느껴진다. "안 하면 안 되냐고." "아읏. 조, 조금만." 꼬마는 아랑곳않고 계속 하고 싶은 걸 해댔다. 우리는 반쯤 찌그러진 캐비닛 안에 포개진 채 누워 있다. 누워 있는 ...
다음날 아침 출근할 때까지 사무실 안에 떠도는 비릿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그 중심에는 희끗하게 말라붙은 이런저런 점액 자국에 찌든 채로 고객용 소파 위에서 여전히 자고 있는 소형 기계가 있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문을 열었다. 그게 썩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냄새까지 이렇게 재현할 필요는 없었는데. 업무시간이라며 툭툭 ...
일주일 전에 파트너가 고장났다. 그녀는 반 정도만 기계 부위로 대체한 사이보그였다. 경찰에게 위탁받은 임무를 하던 도중 실수로 범죄자 몇에게 발각당했고, 처참할 정도로 망가졌다. 기계인간을 수리하는 엔지니어는 되살릴 방법이 없다고 했고, 의사는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소견을 밝혔다. 그러니까, 생체 부위는 어떻게든 안 다쳤지만 기계 쪽은 수리가 불가능할 만큼...
"네, 그… 변기라고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 굉장한 달러 뭉치를 실물로 보여주신 건 감사하지만요…. 아, 아니에요. 위조지폐가 아닌 건 벌써 스캔해서 확인했어요. 일련번호 조회도 끝냈고요. 계약기간이 문제냐고요? 그것도 아닙니다, 선생님. 기간이 너무 길어져서 다른 분들에게 출장을 못 간다든지 하는 사소한 일은 충분한 금액으로 해결될 문제니까요. ...
"으아… 이건 아무리 나라도 백 년 동안 상상도 못 해 본 건데. 이거, 정말 내가 입어도 되는 거 맞아?" 어떻게 입는지도 몰라 헤매면서, 나풀거리는 옷 단추를 간신히 채워나가던 기계뭉치가 그렇게 말한다. "천조각 면적 합이 5제곱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기형 수영복도 아니고, 바니걸 옷에서 가려지는 부분과 안 가려지는 부분을 바꾼 역 바니걸 복장도 아...
"잠깐, 나 좀 보자." 언제나처럼 '출장'을 가려고 짐을 챙겨 나가려던 소녀는 주민복지과장의 부름에 발을 멈췄다. "어, 과장님… 저요?" "그래. 지금 나가려던 거였어?" "네, 출장복지서비스요. 주소를 보니 자주 보던 분이기도 해서, 제가 가는 쪽이 좋겠죠." "그래. 안됐네. 오늘부턴 가지 마." 아이 모습을 한 기계는 연산기능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자기 특유의 문체를 숨길 수는 있겠지만, 남의 고유한 문체를 따라하는 건 꽤 어려워 보인다. 지문이나 홍채인식처럼 문체인식을 통해 보안을 제공하는 잠금장치 같은 게 있어도… … … 조그마한 기계는 잠금장치 앞에서 한참 머리를 굴려 글자를 입력했다. 실제 머리 안에 있는 거라곤 비상이륙용 회전익뿐이고, 연산용 칩은 온몸 여기저기 이식되어 있으므로 '머리'를 ...
"오늘도 저희 구청에서 운용하는 <찾아가는 자아실현행복 복지서비스>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택하신 시간은 짧은 밤이죠? 그동안 정상위를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고, 몇 번 이용하시든 기본 수수료만 부과됩니다." 그러면서도 기계 꼬마는 말만 그렇게 한 채 민원인을 눕히고 올라타며 다시 말을 잇는다. "기승위로 하시면 1000만 원만 더 내시고...
금요일 집회 날, 나는 조용히 신전으로 갔다. 집회가 끝난 후 만나기로 한 장소에는 데이지가 먼저 와 있었다. 벽 건너에 디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데이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데이지 그 동안 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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