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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는 본디 폐하의 양심입니다. 어찌, 이정표를 져버리려고 하시는지요.' 여름난초는 역사적이 폭염이 내리던 그 해 여름, 살인적인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여름에 꽃이 피는 식물은 아니었을지언정, 여름 햇살 아래 가늘고 푸른 잎을 살랑이던 모습이 가히 여름을 대표할 만 하여 여름을 담당하는 사군자로 자리잡았던 난초는 가을을 맞이하지 못하고 자신...
사랑이라는 게 그랬다. 하기 전에는 못 해서 안달인 것을 하고 나면 하는 대로 지랄맞았다. 성숙이라는 것도 얼마나 웃긴지 19과 20의 사랑이 천지차이일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에게서 성숙한 사랑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고딩이면 고딩 나름대로, 성인이면 성인 나름대로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입장이 있을지 몰라도 어찌 됐든 남들 보기에는 길가...
"아, 악, 주세요, 제발, 뭐라도 줘, 응? 미칠 것 같아 제발...!" 남루한 행색이었다. 감지 않아 잔뜩 떡이진 머리와 늘러붙은 옷까지. 어디에선가 피어나는 비릿한 냄새 또한 그의 행색을 보여주는 데에 한 몫을 했다. 핏줄이 터진 듯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이 마주치자 태용은 웃었다. 책상위에 올려진 교과서나 그가 앉아있는 의자와는 전혀 다른, 너무나 이...
유리잔에 얼음이 부대끼는 소리, 그 좁은 틈사이를 우유가 비집고 들어가는 소리, 넘쳐나는 부피에 쩍쩍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까지. 적막한 오디오를 채우는 것은 조잡스런 말소리가 아니었다. 사람 하나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손만이 간간히 출현하는 이 지루한 영상은 구독자 100만 뉴튜버 TY트랙의 신간영상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TY트랙은 잘나가던 게임...
'느티나무는 손을 뻗었다. 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내게 닿으려고.' 민현의 등굣길에는 높은 당장 너머 느티나무 줄기가 늘어뜨려진 길이 있었다. 여름이면 태양빛을 받아 초록빛이 싱그러운 잎을 피어냈으며, 겨울이면 무정한 날씨에 못이겨 기다란 줄기를 힘 없이 달랑거렸다. 남들이 보면 지나가다가도 예쁘다며 사진이나 한 장 찍고 갈 만한 거리였으나 결론적으로 민현...
몸 위로 쏟아지는 발길질이 아프다. 그와 동시에 허리 언저리께의 흉터도 불에 덴 듯 열이 올랐다. 한 없이 몸을 웅크려 보아도 피할 곳은 없다는 듯 매몰아 치는 발들에는 주저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몸을 웅크리면 웅크릴 수록 드러나는 허리춤의 흉터는 그런 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화끈화끈 열을 내뿜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는 ...
안녕하세요! 작년 <고스트코스터 하이스쿨 로맨스> 업로드 이후 두 번째로 인사드리는 단편입니다. *주의사항* 깊고 어두운 바다, 간략화 된 심해 물고기, 강제적인 스킨십
" 이 똥고양이가!" 난장판이 된 거실 사이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활개를 치고 있다. 초보 집사가 깎지 못해 기다래진 발톱에는 휴지며, 커튼이 걸려 죽죽 찢어진 상태고, 아직 어린 고양이인 만큼 방향조절이 미숙한 탓에 이리 쿵, 저리 쿵. 화분에도 한 번 쿵. 멀쩡히 있는 벽에도 한 번 쿵. 미숙한 운전으로 일어난 충돌사고에 야마가 돌아버린 초보 운전...
배진영의 노래방 18번 곡이었다. 백아연의 '이럴거면 그러지말지' "구차해도 묻고 싶어. 그 때 난 뭐였어" 나나나나 나나 나나, 노래방 안을 매우는 노랫소리가 구슬프다. 1절 후렴구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버석했던 목소리는 브릿지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물기를 가득 물었다. 목소리가 구슬픈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보는 사람이 다 구슬퍼졌다. 배진영은 이미 대롱대롱...
소재가 떨어지면 캄캄한 밤을 걷곤 했다. 목적지도 시간도 정해 놓지 않고 걷는 나날들은 편안하기 보다는 괴롭고 외로운 사투의 시간이었다. 머리를 비우려면 비울수록 상념은 자꾸만 여백을 치고 들어와 조그만 머리통을 금새 쓰레기통으로 바꾸어 내곤 했다. 이것은 비단 작업에 대한 압박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영향이 아예 미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도 아니...
날은 좋았고, 시간도 좋았다. 뻑뻑한 눈을 굴리면서 회사 근처를 돌아나니기에는 15분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원래는 옥상정원에서 바람이나 쐬려고 했는데. 이미 흡연자들의 성지가된 곳을 제발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바람을 쐬고 싶은 거지, 담배냄새를 맡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큰길가에 위치한 만큼 회사 주위에는 식당도 카페도 많았다. 큰 길이고 유동인구가 많은...
김회장의 사무실에는 사무용품을 제외하고도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꽂이 옆에 있던 골프채였다. 하나 두개도 모자랐는지 동그란 우산꽂이 같은 전용 통에 가득 들어찬 골프채는 척 보아도 5개가 넘어보였다. 골프채의 호수란 호수는 다 모아 놨는지 막대 끝에 달린 콩나물 같은 대가리가 전부 제각각이었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골프채는 척...
말단은 말이 없는 법이었다. 제가 왔다며 환영 파티를 빙자한 술파티를 열 때도, 위장을 게워낼 때까지 먹고 노래부르기를 멈추지 않을 때도 신입은 군말 없이 상사를 따라야만 했다. 좆같은 대한민국의 계급체계가 그랬고, 관료사회가 그랬다. 결국, 힘없고 돈없고 직급도 없는 자신과 같은 말단은 애인이 부르던 하늘이 부르던 당장 자리를 놓고 집으로 향할 짬밥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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