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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은 경성의 세련된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홀짝였다. 남들이 보기엔 멋들어진 모습이었으나 그의 내면은 경성의 여느 거지들과 다름 없이 추례했다. 아무리 향긋한 커피를 들이켜고 값비싼 양복을 걸쳐도 그는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그 겨울은 그가 경애하는 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넌 히카루가 아니야!!’ 문장이 칼처럼 날카로울 수 있다는 혜진의 말은 본인을 빗...
디엠으로만 만나왔던 선생님께 오프 데이트 신청이 들어왔다. XX대 문창과 재학중, 휴학계를 내고 OO출판사 인턴으로 일하던 낭랑 22세의 겨울, 입영통지서를 받고 곧 군대 입대를 앞둔 정세훈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근데 문제가 좀 많았다. 선생님이 데이트 신청서를 내민 것은 트위터 닉 '히카루' 를 향해서였고, 아무래도 선생님은 히카루를 묘령의 아리따운...
해진은 병원의 2인용 병실 창가 침상에 반만 기대고 앉아서 하염없이 마주보는 병원 건물의 흰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의 병원은 증축을 얼기설기로 흰개미굴 짓듯 해놓은 바람에 전망이 탁 트이기는 커녕 창문을 통해 남의 병실에서 들여다보일까봐 사생활침해를 걱정하게끔 만들어 놓았다. 뭐, 그래도 볼 게 있긴 했다. 흰 벽에는 담쟁이 덩굴이 해진의 파리한 혈색...
선생님. 이 사랑이 만악의 근원이며, 이 사랑이 인간의 구원이니, 우리는 이 사랑을 어찌해야 좋습니까? 해진세훈,,,,, 절필하고 몸은좋아지는데 마음이 병들어서 내가 글을 쓰지않게 되었으니 나를 떠날 생각이 아니냐며 세훈이한테 집착하는 해진이 보고싶음 해진이 손에 든 편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선생님 소설의 이 문장은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단어에서부터...
그 때 커튼이 열리며 하얀 가운을 입은 앳된 의사 하나가 들어왔다. 입퇴원을 반복하고 통원을 오며가며 얼굴이 익숙한, 김해진이 다니는 혈액종양내과의 전공의였다. 삭신이 삐걱거리고 숨을 쉴때마다 색색거리는 천명음이 들렸지만 해진은 얼른 반쯤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콧구멍 안에 들어있는 산소호흡기가 거치적거리고 시었고 입술은 건조해서 바짝바짝 탔다...
※트리거 워닝: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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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낯선 천장이었다. 상업성과 문학성을 양 손에 거머쥔, 이 시대에 둘도 없는 한국형 판타지 소설작가로서 업계에서 탑을 찍는 해진이라면 절대 이런 문장을 함부로 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의를 중시하는 온화한 성품이었고 중도적인 성향이 짙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한 번도 떠든 적이 없었지만 낯선 천장 어쩌고 하는 식상한 도입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
순환하지도 정체하지도 않는 전진 정세훈 김해진 오늘은 내일일까. 눈을 뜨자마자 달력부터 확인했다. 매일 아침 그 전일의 일자에 가위표를 치는 일을 습관 삼은 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행위가 아니었으나 어느 날부터 아주 유용하게 작동하고 있다. 언젠가부터 시간이 앞을 향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뒷걸음질을 치거나 멈춰있는 것도 아니었다. 직진하는 시간이 디딘 ...
동경(憧憬): 1.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2. 마음이 스스로 들떠서 안정되지 아니함. 세훈이 가지고 있던 마음은 처음에는 동경이었다. 비록 해진을 마주하지는 못하였으나 세훈의 눈은 해진을 향하고 있었다. 저 먼 땅에서도 언젠가 닿을 것이라 믿으며 있을지도 모를 모든 곳에 시선을 던졌다. 외로웠으나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평생에 삶에...
그날따라 경성은 간밤에 내린 이른 봄비로 차가운 공기에 상쾌함을 더하였고 더러운 골목골목도 빗물에 씻기어 깨끗한 면면을 내비추었다. 아침일찍 편지를 가져온 세훈은 글을 쓰다 잠든 해진의 곁에 조심히 봉투를 내려놓았다. 작업실은 날이 얼마나 좋던 햇빛 한 줌 들지 않도록 두꺼운 베르-벳으로 암막 커튼을 해놓았으며, 창은 며칠 째 굳게 닫혀 공기가 퀘퀘했다. ...
개나리가 시름없이 흔들리는 산길을 잠자코 걸으면 나온다. 빼곡히 핀 이름 모를 풀꽃들을 지르밟고 말간 시골의 향취를 폐 가득히 담을 수 있는 곳. 이 촌락이 선생님께서 나고 자라고, 생의 끝에 돌아온 곳이로구나. 너른 풍경이 퍽 평화로웠다. 하나 동시에, 우울하다 느끼었던 글들이 기억을 맴돈다. 가슴께가 아리어오는 탓에 입술을 절로 잘근 깨문다. 아침엔가 ...
이상형이 무어냐기에 따뜻한 사람이 좋다고 적당히 대답하고.. 아주 작은 것에도 눈길이며 손길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머리가 떨어진 눈사람을 고쳐놓고 있는 해진 선생님이 눈에 들어온.. 어느 겨울날의 세훈이 막연하고 추상적이던 작은 것에까지 가닿는 다정이란 개념이 삽시간에 구체화되고 그 순간 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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