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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헤메다 의식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눈을 뜨자 낯선 재진이네 집 천장이 보였고, 벨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내가 자기 전에 알람을 맞췄던가? 학교 다닐 때 말곤 거의 안 맞추고 살았는데. 손을 더듬어 협탁에 놓인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보니 알람이 아니라 전화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어머, 세상에. 나 목소리 왜 이래? 급하게 헛기...
5. 가족을 잃다 나는 태인 씨의 차를 타고 공항이 도착했다. 돌아올 거라는 말을 증명하듯 캐리어조차 안 챙겼다. 태인 씨는 그래도 뭐라도 챙기라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는 길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올 계획이라서 간단한 필수품이면 충분했다. "조심히 다녀와요." "내가 한 말 기억하죠?" "기사 믿지 말라고." "절대로 믿지 말아요. 내가 한 말...
"나 왔어요." 숙소에 들어가자 거실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던 태인이 나를 향해 활짝 웃었다. "왔어요?" "왜 이렇게 해맑아요?" "보고 싶었거든요." 순간 구두를 벗던 손에 힘이 풀렸다. 저 여자는 무슨 일상이 플러팅이야. 오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얼굴 좀 봤다고 들뜨는 게 웃겼다. 나 너무 솔직하네. 적당히 설렜으면 좋겠는데 뭐 이렇게 뜨거워. "...
은재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달리 좋은 꿈을 꾸지도 않았고, 그저 푹 잤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과 함께 일어나 태인과 달리기를 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씻고, 아침을 시켜 먹었다. 오늘은 태인이 좋아하는 된장국을 먹었다. 은재는 먹으면서 빌라 드 루나의 한식 서비스는 조금 별로라고 평가했고, 태인은 그래도 셰프를 자르진 말라며 다독였다. 나름 여기서 제일...
4. 예기치 못한 고백 "다녀왔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남편이 옷도 안 갈아입고 딸과 놀아주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딸이 달려와 안기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남편의 얼굴이 새삼 오랜만이라 느껴졌다. "왔어?" "...일찍 퇴근했네." "근무일 늘리는 대신 일일 근무시간 줄였잖아. 다섯 시 전에 퇴근했어." 아, 그게 이번주부터였던가. 건...
쾅쾅쾅쾅! 난데없이 잠을 깨우는 소음 때문에 흠칫 눈을 떴다. 대체 누가 남의 숙소 문을 이렇게 부서져라 두드려? 겁먹은 마음에 나가는 길에 거울 보고 얼굴 정리 한번 하고 나갔다. 문 구멍을 들여다보니 흥분한 듯한 태인이 보였다. 뭐야, 이 여자가 왜... "뭐예요?" "아, 은재 씨! 들어갈게요!" "아니, 잠깐만..." 문를 열어주자 말릴 새도 없이 ...
"...으으, 눈부셔." 내가 어제 블라인드를 안 내리고 잤던가, 하며 눈을 비볐다. 차츰 초점이 돌아와 천장의 전등이 또렷해진 순간, 세상이 뒤집어졌다. "우욱-"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간신히 온 바닥에 토하는 참사는 면했지만 속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변기통과 한바탕 씨름을 했다. "...설마 변기가 막히진 않겠지?" 설마 하며 물을 내렸...
"술 마신다더니 왜 벌써-" "안녕." 문을 닫았다. 뭐야, 백정현이 왜 여기 있어? "그... 그렇게까지 문전박대할 건 없지 않나." 문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모르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잠깐만, 사람을 붙였나? 그건 말이 달라지는데. 여기가 내 소유고 내가 좋아하는 곳이니까 당연히 여기 ...
"와, 해장 토스트 뭐예요? 냄새 좋다." "먹을 준비 해요." "언니라고 불러줬다고 아침 해주는 거예요?" "타이밍이 짜릿하잖아. 여우가 따로 없어." 달걀물 입힌 토스트를 굽던 태인이 몸을 돌려 은재를 흘겨보았다. 자기 숙소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은재는 식탁으로 직진하다가 태인의 눈총을 받곤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는 고양이라며." "가끔은 토끼일 때...
준혁이 직접 물었던 탓에 온기가 남은 담배 필터가 입술 끝에 닿았다. 입술을 살짝 벌리면 당장이라도 흡연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제 앞에 놓인 담배는 그저 흡연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제가 이런 것에 무감하대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대답을 하려면 입을 열어야 하고 입을 열면 담배가 들어오겠지. 그럼 준혁은 제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
"반태인?" 툭 튀어나온 중얼거림과 동시에 상대가 놀란 표정으로 기립했다. 투명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한참 동안 대치하던 서원은 주먹을 꾹 말아쥐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태인은 제 앞까지 걸어오는 서원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발끝에서부터 쭉 훑어보았다. "혼자서... 두 개?" 태인은 팥빙수와 딸기 빙수를 시켜 혼자서 ...
3. 주연에서 조연으로 호텔백호 본사. "인스탠스와 함께 일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야말로 호텔 백호에서 저희 회사를 먼저 찾아주실 줄 몰랐습니다. 그것도 대표님이 직접." "아닙니다. 저희 직원 실수로 주말에 도장을 찍게 되었는데, 책임자가 나오는 게 맞죠. 제가 인스탠스를 고집한 거였는데." 정현의 저자세에 머리가 반쯤 희끗하게 센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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