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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않을 것 같았던 해는 일찍이 져버렸고, 습하고 축축하던 공기는 어느새 건조하고 삭막해졌다. 피부를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바라본 창문 밖엔 하이얀 나무들이 행렬을 이루었다. 슬프게도 적막한 겨울이 어느새 여기에 머물러있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이다. __ “형, 저기 봐요. 노을이 정말 붉어요.” “...
형,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세상이 끝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저는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형을 볼래요.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찮아,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담고 있는 하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아련하고 처연한 제 상황을 드러내주려면 족히 이틀은 무슨 일주일 내내 비가 와도...
강태현 최범규 <System: 세이브 포인트가 저장되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미친 거 아님? 하하하하하하하. 이게 말로만 듣던 라식 부작용? 하하하하하하하. 혹시 면허 없는 의사한테 받은 건가? 하하하하하하하. 넋을 놓은 것 같은 웃음. 태현은 다짜고짜 제 뺨을 스스로 세게 내려쳤다. 옆자리 남자가 그 모습을 보더니 경악했다. 괜찮냐는 안부와 ...
"교내 근로 알바 공고 떴던데 님도 신청할 거임?" 장장 5시간에 걸친 크리틱이 끝나고 진이 빠져 책상에 널브러진 범규에게 동기가 물었다. 교내 근로 아르바이트는 공강 시간 이용해서 할 수도 있고 시급도 나쁘지 않아서 인기가 많아 경쟁률이 치열했다. 수빈이 하는 네트워크팀 교내 근로는 컴공과 우대 조건이 있어서 경쟁률이 그나마 좀 낮은 편이기도 했지만 수빈...
미국 오하이오주. 여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찌는 더위에도 운동장을 누비는 교내 럭비 선수들의 뜀박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뜨거운 태양 아래. 그와 비슷하게 열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던 경기는 코치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멈춘다. 한 시간을 죽어라 뛰고 주어지는 쉬는 시간은 겨우 오 분. 모두가 볼멘 소리를 내며 갑갑한 헬멧을 벗...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강태현은 제 인생 최대의 위기가 수능 시험장에서 오리라 예상했으나, 이세계에 떨어진 뒤로는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다. 수능은 답이 정해져 있었고, 기다리면 그 답이 나왔고, 내로라 하는 인강 강사가 풀이를 실시간으로 내놓았다. 그걸 이해하고, 체화하고, 다른 문제에 적용하다 보면 답이 보였다. 오류와 수정의 과정. 그렇게 완벽을 ...
내 나이 서른 넷, 문득 즐거운 일만 생각하기엔 너무 현실을 사는 게 아닌가 싶었다.
* 메디컬 소재 트리거 주의 ** 글 쓴 사람이 무지한 관계로 현실고증 구릴 수 있음 1. 내일종합병원에서 소아과 최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페드 R2 최범규. 잘생겨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소아과 전체에서 유일한 2년차였기 때문이었다. '내일도 함께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범규와 함께 시작했던 레지던트 동기 두명은 일년만에 증발해버렸다. 윗선에서 레지...
1. "날씨가 많이 덥네." 기쁜 듯한 목소리였다. 여름은 좋은 계절이다. 낮이 길고 밤이 짧아 귀신이 돌아다니는 시간이 줄어든다. 귀신이 덜 돌아다니니 사고도 덜 나고 인간들도 비교적 안전할 것이다. 뉴스에서는 봄이 너무 짧아졌고 여름이 이르게 찾아왔다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일기 예보를 전하지만 수빈은 번거로운 더위가 꽤 반가웠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
수빈의 말에 연준은 꿀먹은 벙어리 마냥 수빈만 바라보았다. 수빈은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며 말했다. "... 형도 나랑 헤어지고 싶죠? 형도 다른 사람이랑 다를게 없었어." "아닌 거 알잖아." "형도 날 버거워 하잖아 지금." "그런게 아니라 네가..." "..." 수빈의 계속된 눈물에 연준이 수빈에게 다가가 수빈의 손을 잡았다. 연준의 손등에 수빈의 눈물...
강태현은 최범규의 한 마디에 바로 안경을 벗어 던졌다. 진작에 벗고 다니지. 범규의 말은 태현의 머리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별로였나. 태현은 안경을 거울 앞에서 한참을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과장이 아니라 태현의 눈은 실시간으로 두 배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다. 태현은 안경을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가장 아끼는 재킷을 꺼내 입었다. 근의 공식부터 ...
허락받지 못한 범규는 머리에서부터 피를 쏟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리에서 그다음은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귀에서... 모든 혈에서 혈이 나오고 있었다. 천천히 흐르던 피는 점차 그 속도도 빨라지고 양도 많아져 베란다의 하수구에 흘러 들어가 집 안이 피 냄새로 자욱했다. 태현은 그런 범규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이 찰나에 일...
03. 인생은 알다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범규는 그 말에 몹시 공감하는 중이다. 범규가 학교에 발을 들인지 약 3시간이 지난 시점, 점심시간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 범규는 태현이 매우 편해졌다. 이게 바로 인생은 알다가도 모른다는 말과 일맥상통 한다는 점이랄까. 까칠해 보여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던 괴짜 강태현이 이젠 범규에겐 스스럼없는 존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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