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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약 3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모두가 이온을 보았다. 미술실 안의, 눈이 달린 모든 것이 이온을 보고 있었다. 살아있는 다섯 명 말고도 벽에 걸린 그림들과 석고상마저. 고랑지가 근처에 있던 서랍을 열어 커다란 가위를 챙겼다. 쿵.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석고상 하나가 탁자에서 떨어진 것이다. ...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는 캄캄한 교실이었다. 이온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어지러운 걸 제외하고는 멀쩡한 것 같았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보담이랑 같이 있었는데……. 보담이는……. 마지막으로 본 보담의 뒷모습을 생각하던 이온이 별안간 헛구역질하는 소리를 냈다. 진득하게 녹아 뼈를 타고 흘러내리는 살점이 떠오른 것이다. 사람이 아닌 무...
뒤를 돌았다.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는 오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너머로, 검은 형체와 대치 중인 깡이 있었다. 그것은 눈이 없었다. 눈알이 모두 파여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피가 고인 두 개의 구멍만이 남겨져 있었다. 깡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그것과 눈을, 텅 빈 구멍을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발이 굳어 뒷걸음질도 칠 수 없었다. 피로 젖은...
가장 흉내 내기 쉬운 감정은 기쁨도, 슬픔도 아닌, 공포. 때문에 유독 겁이 많은 이온은 그것들이 모방하기에 안성맞춤인 이였다. 보담이 귀신을 향해 책가방을 휘둘렀을 때, 이온이 비명을 질렀다. 비단 책가방에 맞고 쓰러지는 귀신의 모습이 흉해서만은 아니었다. 이온은 책가방을 있는 힘껏 휘두르는 보담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아니, 마치 눈을 감...
고요는 한없이 길게 이어졌다. 누구 하나 몸을 움직이거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앞문을 주시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깡이 몸을 움찔했다. 오토는 남은 힘을 끌어모아 대걸레를 들었다. 고랑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앞문에 달린 유리창을 살폈다.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어둠이 가시지 않아서 ...
신문부. 현재 신문부 부장의 자리를 맡고 있는 이는 3학년 김오토. 그래, 물기 하나 없이 비쩍 마른 대걸레를 들고 팔꿈치로 기어오는 그것의 얼굴을 흠씬 두들겨 패는 김오토.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 이미 예견한 일이었다. 끼에에에에에엑! 대걸레에 안면을 강타당한 그것이 죽어라 비명을 질러댔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에 정신이 흐려진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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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쳤지. 고랑지가 작년의 자신을 책망했다. 차기 미술부 부장을 해보지 않겠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인 잘못이 컸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혼자 남아 축제 준비를 하고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미술부는 올해 축제 때 페이스페인팅 부스를 열기로 했다. 고랑지가 장장 4시간 만에 완성된 페이스페인팅 예시 도안을 미술실 서랍 안에 넣...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태복음 24장 29절- 묵시록(黙示錄) 1 무더운 여름이었다. 온갖 눅눅하고 습한 기운이 몸을 짓누르는, 그런 여름이었다. 그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이는 대략 열댓 명 정도. 광조는 그날도 음악실에 혼자 남아 다음 주에 있을 동아리 ...
김오토는 소위 말하는 미친놈이라고 했다. “진짜 미쳤지. 고랑지 눈에 들겠다면서 자사고도 포기하고 세인트 마리로 왔으니.”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지만.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화단 둘레를 걷던 깡이 이온의 설명에 걸음을 멈칫했다. 자사고? 포기? 고랑지 하나 때문에? 당최 상식적인 선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에 깡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이...
깡은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때까지는 기숙사의 고급진 침대의 질을 보고 참아왔지만, 이젠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깡이 쉬는 시간을 틈타 기숙사 방에 들어왔다. 전학 온 첫날 챙겨온 캐리어의 지퍼를 열었다. 눈물을 머금고 텅 빈 캐리어 안에 옷가지들을 쌌다. “깡이 너 뭐해?” 때마침 기숙사 책상에 놓고 간 레시피 노트를 챙기러 온 이온이...
“괜찮아?” “안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명백한 내 잘못인데 뭐 어쩌겠어.” 이온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깡이 머쓱하게 웃었다. 깡과 함께 다음 이론 수업을 위해 교실로 들어가려던 이온이 엥,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말고. 너 스위트 왕자 추종자들한테 제대로 찍힌 것 같은데 괜찮겠냐고.” “엉?” “엉은 무슨. 너 이제 큰일 났어....
“오늘의 실습 주제는 커스터드푸딩 만들기다. 제한 시간을 넘기는 팀은 감점이 되며, 모양과 맛은…… 당연한 요소인 만큼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선생님이 시작 신호를 알림과 동시에 아이들이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커스터드푸딩? 먹어본 적은 있어도 만들어본 적은 없는데. 아니, 제과제빵 학교라며! 첫 수업부터 케이크나 쿠키도 아닌 푸딩이라니. 예상을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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