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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주야.” “네?” “너 나 좋아하지.” “...알면서 왜 물어봐요.” 혜주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혜주는 희진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알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희진은 아직도 여자가 여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희진에게 그것은 끊임없이 확인 받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반짝하고 사라져버릴 신기루처...
꼭 저를 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아이를 볼 때면 너도 참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용건도 없으면서 자꾸 말을 걸었다. 혜주야 안녕, 혜주 오늘 일찍 왔네, 혜주 점심 뭐 먹어, 아직 안 정했으면 나랑 떡볶이 시켜 먹을래, 혜주야, 혜주야... 비록 나는 오랜 시간이 걸려 어렵게 적응했지만, 너만큼은 빨...
최예림 토요일에 부모님 여행 가신다고 손혜주한테 자기 집 와서 자고 가라고 함. 놀러간 적은 많은데 자는 건 처음이라 기대하면서 짐 바리바리 싸들고 온 손혜주. 터질 것 같은 손혜주 가방 보고 얘는 무슨 여행 왔냐며 꺄르르 하는 최예림. 둘이 거실에서 티비로 넷플 호러 시리즈, 판타지 영화 하나씩 사이 좋게 보면서 놀다가 떡볶이 시켜서 다 먹고 나니까 시간...
누구나 하는 짝사랑이었다. 누군 가볍고 누군 짧은. 흔해 빠진 짝사랑이었다. 다만 내게는 가볍지 않았고, 피치 못하게 길어졌을 뿐이다. 내 꼴을 자랑하며 유난을 떨 그런 무언가는 아니었다. 짝사랑. 짝사랑은 왜 남모르게 하려고 애를 쓰는 걸까? 목을 넘어가는 커피가 늘상 그렇듯 썼다. 지그시 감은 눈을 뜨고 입구를 뚫어지게 본다. 자주 깜빡이지 않으면 시력...
NG(Nerd와 Geek의 약자) 연구소에 때아닌 토론의 장이 열렸다. 주제는... 손혜주는 동물인가, 인간인가? 정정. 방금은 최예림에게만 국한된 이름이고. 'WS13은 동물인가, 인간인가?' 독수리 날개 달린 사람과 한국어를 하는 코끼리를 기숙시키고 있는 연구소에서 나올 주제는 아니지만... 벌써 2주째 팽팽한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핑계를 대자면 아주...
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수신인 불명의 질문. 말하자면 나에게서 나에게로 온 통신이었다. 하지만 곧 끊어져 버리고 만. 나는 보란 듯이 침묵을 택했다. 별 의도 없이 내리깐 눈 안에 성의 없게 포장된 사탕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매일 하듯이 포장지를 까서 그 빨갛고 딱딱한 것을 입속에 넣었다. 싸구려 체리 향이 코끝을 찔렀다. 향기에 묻어가려 바둥대는...
휴르르 님, 요정 님
돈을 걸어. 여긴 수수료가 그나마 적다고... 리는 반사적으로 이미 꽉 차 아슬아슬하게 넘치는 꼴을 면한 나무바구니의 위쪽을 무작정 꾹꾹 누른다. 귀에 들려온 말은 또 한 푼 땡길 수 있다는 신호 같았다. 리는 영업용 미소를 환하게 띠며 연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뒤를 돈다. 가을 바람에 지폐가 날아갈까 바구니에 아랫팔을 잔뜩 담근 채로. "시원한 액수에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한 사회학자의 옛 발언이 대두되었다. 역사상 최악의 재난과 전쟁들을 겪은 지구는 예상치 못한 문제를 안게 된다. 출산율 급증. 인구 수가 폭등하게 된 것이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단어들이라하면, 자원 부족과 빈부 격차의 심화 같은 것들. 정보 기술은 점점 발전해가는데 에너지 기술은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식량은 물론 더 이상 산업 ...
21세기 말 대기업 패트론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차례라며 짤막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영원한 죽음은 없다! 안드로이드 보험의 시작.' 생명공학의 선두주자였던 그들은 미래의 상징인 안드로이드를 한 걸음 더 발전시켰다. 슬하에 보험회사를 설립하여 거대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내용은 간단했다. 사망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미리 채취해...
반장 고백 받았대. 뭐? 예림이 순식간에 제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갑자기? 예림이 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썸이라도 있었던 거야? 혼자 솔탈하는 거냐고? 왁자지껄 몰려서 한 명 한 명 떠드는 소리를 다 받아내려니 정신이 없었다. 얘들아 그게 아니고, 여기저기 돌던 쪽지가 다시 제 손으로 들어왔다. 예림이 몇 번이고 눈을 씻고 다시 ...
너는 왜 맨날 환절기에만 난리야 나도 몰라 빨리 코 풀어 그래도 네가 약 사다 주잖아 병원 가 병원 약이 훨씬 더 잘 듣는데 말도 안 듣고 응 가볼게 뻥치고 있네 너 나랑 같이 가 내일 예약해 나 바쁜데 언제는 안 바쁘냐 주말엔 갈 수 있어 주말에 가 그럼 같이 가줄 거야? 가주는 게 아니라 가는 거야 너 감시하려고 아 그래서 가줄 거냐구 그래 밥도 사먹자...
나는 결혼 안 할 거야. 연애도 안 할 거야. 열여덟 나이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혜주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사실 조금 서글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많이.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하고 말 게 어딨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혜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혜주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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