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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댠 님, 쥬나 님
짝사랑도 연애를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안정원의 연애는 참으로 길었다. 혼자 하는 연애에 지쳐 떠나리라 통보했을 때 준완의 답은 짧았다. “그래? 가끔 놀러 갈게.” 정원은 그로써 오래도록 외면했던 답을 받았다. “야, 김준완. 너 알고 있었어? 안정원 떠난다는 거?” “뭐? 제주도? 알고 있었는데. 걔가 니들한테는 말 안 하던가?” 오랜 친구가 떠난...
주말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은 휴대폰 알람소리를 들으며 기상했다.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커튼을 활짝 젖히는 것이었으나 볕은 들어오지 않았고 방은 여전히 캄캄했다. 주말이면 해가 중천에 솟을 때까지 빈둥거리고 싶을 법도 한데 그는 기지개를 쭈욱 켜고, 늘어지게 하품하며 거실로 나갔다. 거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가 오전 6시를 조금 ...
간만의 오프에, 간만에 날이 좋았다. 여름 장마로 내내 흐린 하늘이 지속되더니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비구름 뒤에 숨어있던 해가 드디어 밖으로 나와 자신의 열기를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선팅이 된 차 유리를 뚫고 준완의 얼굴을 따갑게 비추었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 위에 그늘이 드리우고 나서야 인상이 펴졌다. 정원의 손으로 만든 작은 그늘이었다....
※개연성 없고, 캐붕 있고, 빻았습니다. 그런 날이 있었다. 너의 웃음이 바이러스처럼 내게 감염되고, 살을 맞대면 감염된 병균이 온몸에 가득 퍼지던, 그렇게 네가 곁에 있기에 몸속 세포를 채워오는 이 행복을 만끽하며,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사랑을 하던 날이 있었다. 너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
OBGY 또는 쉽게 말해 산부인과. 그 중에서도 산과. 새 생명의 탄생을 다룬다는 점에서 가히 병원의 꽃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모든 꽃들이 만개하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희망을 품고 의사를 마주했던 이들이 끝내 시들어버린 꽃과 같은 모양새로 맺힌 물방울을 떨구면 애도의 물결이 진료실 앞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 풍경을 준완도 가끔 보았었다. 솔직히 크게 ...
가바나 님, 직업인 A 님
안녕하세요. 저는 작년에 새로 율제병원으로 옮겨 온 GS 펠로우입니다. 이렇게 말하기 조금 쑥스럽지만, 소아외과 안정원 교수님을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다들 교수님이라고 하면 나이가 지긋하신,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런 분을 상상하시겠지만, 안정원 교수님은 다릅니다. 못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부드러운 매너는 물론이고, 아이들에...
※2022.03.22 일부 내용 추가 및 부분 수정 만약, 김준완의 집이 덩치 큰 조폭이라면? "김세라님, 들어 오실게요.” 준완의 모든 동작이 멈췄다. 손소독제를 펴 바르던 손도, 환자의 차트를 보기 위해 돌리려 했던 고개도, 깜빡이던 눈꺼풀도, 폐에 숨을 불어넣던 호흡마저도 정지했다.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드르륵 ...
준완은 비 오는 날이 싫었다. 하늘이 우중충해서 싫었고, 높은 습도로 꿉꿉해지는 것이 싫었고, 비에 젖는 바짓단이 싫었고, 철벅철벅 제 구두에 진흙따위가 묻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비가 오면 찌르르 울려오는 통증이 싫었다. 그가 잠옷 바지의 오른쪽 끄트머리를 살짝 올리자 발목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 하얀 발목 위에는 오래된 흉터가 선명히 자리했다. 오늘처...
※기존에 올렸다가 쓰레기통에 넣은 거 리메이크입니다. 따르릉 벨소리가 울렸다. 작고 투박한 것에서 나는 소리다. 몇 년 전만해도 알림이 울리면 숫자만 겨우 띄워냈던 초록색 화면은 이제는 무지개보다 더 많은 색상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모두 합한 것으로 글자를 그려냈다. 그리고 지금처럼 송송 구멍이 뚫린 곳에서 흥겨운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하는 ...
"안정원 원래 그런 놈이잖아. 나도 안정원이 까준 새우 100개는 먹었어 새꺄." "그래, 준완아. 네가 좀 이해해. 걔 그러는거 아무 의도 없는 거 알잖아." "안정원이라면 그럴 수 있지." 저마다 나름의 위로를 건네왔으나 준완이 기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의 기분은 이제 더 낮아질 곳이 없어 땅을 파고 들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안정원과...
"김민준환자, 23시 02분 사망하셨습니다." 준완은 제 환자의 보호자에게 덤덤히 고했다. 퇴근길에 들린 서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꺼내든 책의 첫 문장을 읽는 것처럼 무심하게 짧은 한 문장을 내뱉었다. 이미 끝인걸 알았지만 모른 척 외면했던 것을 의사의 한마디가 기어코 현실로 가져왔다. 남자는 힘이 풀려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가 누워있는 침대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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