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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너를 붙잡으려고 애써왔다. 왠진 몰라도, 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다. 그냥. 네 깊은 눈이, 곧게 편 허리가, 언제나 단정한 교복 셔츠라든지, 책상을 소리 없이 두드리는 느린 손가락, 한 번도 높아진 적 없는 목소리가, 여럿이서 있음에도 혼자 있는 것 같았고, 혼자 있음에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고, 한숨 같은 웃음을 짓던 네가 내 평생을 기억...
윤희에게서 편지가 왔다. 아기자기한 패턴의 편지봉투는 언젠가 그녀의 책방에서 봤던 그림 따위를 떠올리게 했다. 보내는 사람, 이윤희. 받는 사람, 임중경. 고지서나 대출 광고 말고는 무언가가 꽂히는 일이 전혀 없으리라 생각했던 우편함 속, 낯선 편지를 잠시 내려다보던 중경은 곧 그것을 구겨지지 않게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검은색 반팔 티 한 장만 입...
원죄를 지은 것 같았다. 선악과를 한 입 베어문 것처럼. 과거에는 인식하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했던 것이 이젠 눈 앞에 선명한 빛으로 떠올랐다. 특기대 내부에서 '그날'은 좀처럼 위에서 이름 붙여준 어떤 사태의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없었다. 금단의 단어같이. 언론이 붙여준 별명은 더욱 금기시되었다. 작전에 포함됐던 대원들이 하나 둘씩 더 이상 훈련소에서, ...
1. "한상우. 잘 지켜봐라." 알겠습니다. 대답이야 착실히 했지만 속마음은 떨떠름했다. 팔자에 없는 병..간..호..요? 그냥 병간호도 아니고 책을.. 못 보게.. 하라고? 한상우는 침상 위 등을 세우고 앉아, 이미 문 밖으로 나서는 사내에겐 보이지도 않을 거수경례를 굳이 올려붙이는 뒤통수와 그 아래 목덜미를 잠깐 감상했다. 그리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
테러에 맞서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수도경비 특수기동대에 대해 설명하자면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일부 비전투 인력을 제외하면 전원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언제든 신속한 현장 출동이 가능하도록 전 대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며 기강 유지와 보안 차원에서 외부인의 출입은 거의 불가능, 휴가와 외출은 날짜와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 출동 사이렌...
"잠깐 쉬었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연신 나오던 헛기침을 뚝 잘라버리기라도 하듯 던져진 말이었다. 가래침이 튀어나오지 않을지 걱정될 지경으로 요란한 기침을 해대던 신임 특기대장은 크으음, 마지막 헛기침을 길게 뱉었다. 뜻밖의 방해를 받아 불쾌해진 기분을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대장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은 통에 기침 세례를 그대로 받고 있어야 했던...
첫째, 시드머니부터 악착 같이 모은다, 최대한 빨리.
새벽 4시 반. 골목길이었다. 한상우와 임중경은 묵묵히 후미진 골목길을 걸어 내려왔다. 외부 임무를 끝마치고 복귀하던 중이었다. 24시를 넘겼으니 한상우는 오늘부터 휴가였고 임중경은 아니었다. 밀려오는 졸음도 쫓을 겸 한상우는 나 오늘 집에 간다, 알지? 말을 걸었고 임중경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응. 하고 짧게 답했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이라 고개...
기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부터 피해다니겠지 한상우를. 그도 나와 같이 환생했는지 전생 기억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기억을 지닌 채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까 봐. 다시 만나지 않게. 눈에 띄지 않게. 다시는 그 애증에 얽히지 않게. 나로 인해 미쳐갔던 이가 다시는 생기지 않게. 이번 생엔 평탄하게 살다 평화로이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피의 금요일. 어디의 한가한 호사가가 그딴 작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부르지 못했다.그때.. 그. 그렇게만 끝이었다. 우리끼리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아서, 머릿속에 눌러붙은 그 기억을 끄집어내 먼지를 털고 바라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 귀신이 나타나 기웃댄다는 말을 들...
"잊어버리지 말고 꼭 알려줘. 부탁한다."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 초코파이 한 상자를 받아든 채 동기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부탁하는 거야." 원체 거짓말엔 소질이 없는 터라 중경은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등 뒤에 숨긴 손은 이리저리 비틀어대느라 바빴다. "뇌물까지 줘가면서 하는 부탁이란 게 한상우가 오면 알려달라고?" ...
한상우는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불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누가 그를 흔들어 깨우기 전까지는. "한상우. 상우야. 그만 자고 일어나." 누가 날 깨워.. 그는 짜증스레 팔을 내저으려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떠보기로 했다. 그리고 숨을 들이켰다. 임중경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네가 어떻게 들어왔어." "너네 집 비밀번호. 내 생일이라고 네가 ...
김철진이 처음 신참 특기대원으로 들어왔을 때, 임중경은 이미 특기대의 최고참이자 무서운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철진은 중경에게 어리고 약한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는 선뜻 상상하기 어려웠다. 설마 저 사람도 어릴 때부터 저렇지야 않았겠지, 철진은 무뚝뚝한 아기 임중경을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김철진, 지금 웃음이 나와-"불호령을 얻어맞은 철진은 퍼뜩 정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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