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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노래를 중얼거렸다. 흥얼거렸다기보단 중얼거렸다는 표현이 옳았다. 텅 빈 대학 캠퍼스를 지나다가 민들레를 봤다. 그게 이유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에 불렀던 동요였다. 문득 민들레를 보고 연고도 없이 떠오른 노래. 민들레는 어디서나 잘 자란다. 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작 처음 이 책을 접한 건 SNS를 통해서였다. 제목이 아름다워서 마음에 들었고 나는 당장 구매를 결심했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예쁘다는 표현보단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하드커버가 묵직하게 이야기를 싣고 있음을 전해주고 이규태 일러스트레이터 분의 표지는 꼭 우주 어딘가의 행성에서 바다...
체념이 솜이불처럼 무겁게 머리 위로 가라앉았다. 아빠가 죽은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갔다. 나는 이제 삼십이 넘었고 나름 독립해서 내 삶을 잘 꾸려나가고 있었다. 엄마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엄마는 늘 내게 과한 것을 요구했고 거기에 한 번 대들었다가 아빠에게 뺨도 맞아봤다. 부모란 속박이었다. 나를 억압하고 가두는 박스 같은. 그래서 난 성인이 되자...
그 사탕에서는 쓴맛이 났다. 이렇게 모순된 맛이 있을까. 롤리팝이 쓰다니. 주은은 사탕을 입에서 뗐다. 오랜만에 놀러 온 놀이공원이다. 굳이 쓴맛을 볼 이유는 없었다. “뭐야, 맛없어?” 주은과 팔짱을 끼고 걷던 라연이 주은을 바라봤다. 라연은 주은과 다르게 쓴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탕을 즐기고 있었다. 주은은 찡그린 표정을 일부러 과장스럽게 지었다. 조...
나무 끝에 유리잔이 걸려있습니다. 누군가가 파티라도 하던 걸까요? 나는 버섯을 먹고 키가 커져서 잔을 내려왔습니다. 평소라면 채셔가 발로 툭 쳐서 깨뜨리고 나는 채셔를 혼내주러 쫓아갔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채셔도 없습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저 위까지 이 고운 유리잔이 올라갈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답은 모자 장수였습니다. 나는 숲길을 주욱 걸어 들어갔...
나는 바다를 싫어합니다. 발도 닿지 않고 괴생물로 그득한 데다 그 밑은 빛도 비치지 않는걸요. 길이 없어서 돌아가지 못하게 되기 일쑤고 그러다 상어를 만나면 그대로 이 생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이사 장소가 여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는 정말로 버려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이 고립된 섬의 부족에게 맡겨진 상황에 그런 생각이 들...
안녕하세요. 먼 과거의 인어입니다. 마녀님은 나를 바다 프로젝트라고 부르셨으니 바다라고 불러도 좋아요. 혹은 그저 인어라고 불러도 상관 없습니다. 사실은 이 편지가 제대로 당신께 도착할지부터가 의문이라 무슨 말을 얼마나 적으면 좋을지조차 고민입니다. 그래도 덕분에 북극에 조금 더 머물 이유가 생겼습니다. 마녀님이 인간들 가까이엔 가지 말라고 해서 얼음을 떼...
까마귀가 날아올랐다. 오목눈이도 날아오르고, 황새도, 매도, 참새도 날아오르겠지. 나는 높은 나무의 제일 높은 가지에 앉아서 가끔 가늘고 굵은 가지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르는 새들의 울림을 느끼며 땅을 바라봤다. 인간세계에서 본 악기 중에 꼭 이런 게 있었다. 손가락으로 현을 퉁퉁 퉁기면서 울림을 주면, 새의 노랫소리보단 낮고 굵은, 그러나 꼭 심장의 박동...
휠체어가 지나는 바닥이 평탄치 않은 게 좋았다. 뒤에서 밀어주는 알루사는 힘이 드니 불편하겠지만 나는 바닥에 오래도록 자리했을 돌멩이가 하나 둘 바퀴에 주는 울림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습하다.” “그러게.” “숨 쉬기는 괜찮아?” “응. 냄새가 좋아서 상쾌해.” “좋아.” 알루사가 숲의 공터 초입에 휠체어를 세웠다. 나는 폐가 터지도록 수...
어둠이 부르는 노래 어스름 와 줘요, 그래 롤랑이 밤을 부르면 클라라는 새벽을 부르어여 밤이 부르는 노래 남쪽엔 지는 굴레 클라라가 밤을 부르면 롤랑은 어여 뛰어가리오ㅡ 바나는 절벽의 끝에 앉아서 노래를 불렀다. 바나의 절친이 된 강아지 도호가 곁에 커다란 몸을 말고 바나의 허벅지에 등을 기대었다. 바나는 밤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덥수룩이 내려와 얼굴을 다...
유화용 붓에 물감이 포옥 젖어 들었다. 자줏빛 보라색이 캔버스에 꾸덕하게 묻어나고 물감 덩어리 아래로 녹은 색이 분리되어 흘렀다. 곱게 그린 도라지꽃이 못나게 망가졌다. “야, 그거 덜 섞었어.” “상관없잖아. 팔 것도 아니고.” 소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마저 붓을 놀렸다. 붓을 떼지 않은 채로 움직인 탓에 또 그림이 어그러졌다. 이제는 오히려 번지고 흐른 ...
십이월 어느 날, 나는 이 편지를 남깁니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바로 ‘강’의 끝으로 갈 거예요. 날짜는 일부러 쓰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날 찾아오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은 너무나 똑똑해서 작성 날짜를 쓰면 내가 얼마나 떠나갔을지 추적해올 능력이 충분함을 나는 모르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찾아오지 않기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며 편지를 씁니다....
나는 바다를 싫어합니다. 발도 닿지 않고 괴생물로 그득한데다 그 밑은 빛도 비치지 않는 걸요. 길이 없어서 돌아가지 못하게 되기 일쑤고 그러다 상어를 만나면 그대로 이 생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이사 장소가 여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는 정말로 버려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처음엔 엄마를 둘째로는 아빠를 그렇게 가족을 잃고 이리 고립된 섬의...
안녕하세요, 바다입니다. 누군가에게 소식을 전할 때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배워서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마녀님은 안녕히 계신가요? 지나가다 주운 유리병에 담아보내다보니, 부디 주소없는 이 편지가 마녀님께 이끌려가 잘 도착했으면하는 바람입니다. 요즘은 북극해를 떠돌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행태로 물이 많이 따듯해졌다고 하지만 처음 오는 나에겐 피부가 갈라지도...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내 사명은 독립된 조국을 되찾는 일이야.” “나는. 나는!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여태까지 나랑 장난친 거 아니잖아. 그렇잖아!” 밤의 어느 골방에는 호롱불만이 팔랑였다. 나가려는 사내와 비단 가운을 두른 여인. 아니, 자세히 보면 사내가 아니라 단발을 한 여인이었다. 그녀를 붙잡는 여인은 막 씻고 나온 듯 물이 뚝뚝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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