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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빨리 나를 잊어요. 내 사랑의 마지막 유언이었어요. 그게 마지막 소원이라면 꼭 들어줘야겠죠.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문제상황이 정확히 뭐죠? "제가 너무 뛰어난 인공지능이라서 아무것도 망각하지 못한다는 거요." —어디까지 시도해보셨죠? "풀 수 없는 난제를 하나 입력해서, 제 안의 피드백 순환이 무한히 이루어지게 하여 과부하를 일으켜 다른 ...
‘지나치게’, 의사로서 익숙한 단어였다. 지나친 약물의 사용과 지나친 불면과 지나친 스트레스. 지나친 것들은 언제나 임종을 앞당긴다. 스즈키 스미에는 자신에게 무엇이 지나쳤는지 반추해 보았다. 아무것도. 죽음이 스즈키 스미에를 선택했고 스즈키 스미에가 죽음을 선택했으며 두 가지는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기회가 너무 좋았고 긴 여행에서 돌아올 수는 없었다...
리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친히 강림해서 성산 점령을 승리로 이끈 이후, 달리 어디서 살 수 있겠냐는 듯 자연스럽게 씨시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씨시가 리스에게 “어디 불편하신 데 없습니까”하고 물어본 게 벌써 네 번째다. 이 질문은 3년 간의 세일즈로 굳어진 말버릇이었으나, 거실에 소파 하나 두지 않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들끼리 이런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
씨시니우스는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으니 평소라면 공유택시 같은 건 생각도 안 해 봤을 것이다. 성수기 크레타의 복작복작한 관광인구를 타깃 삼은 ‘헤르메스’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만큼 검증 안 된 운전자들의 범죄로 유명했다. 하지만 거리는 싸늘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고 버스는 40분에 한 대식 온다. 겨울철의 해수욕장은 모래벌판에 불과했으니까. 지금 같은 저...
K는 실실거리며 웃고 있는 기분 나쁜 남자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완벽한 금발의 군인을 K는 너무 오래 알고 지냈으나, 이 사람과 쿠데타, 테러, 혁명,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결국 반란인 것을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다. K가 아는 그의 프로필은 이러했다. 이름은 M, 갖은 훈련으로 다져진 신체도 이제는 슬슬 건강을 염려해야 할 사십 대의 나이, 쓸 만한 전...
H에게는 딸과 아들, N과 O이 있었지만 그녀가 애정을 담아 ‘(*애칭)'을 부를 때 대답하는 건 N뿐이었다. 두 살 터울의 누나가 엄마의 과한 사랑에서 O을 지켜 주었고, O은 그 점에 대해 미안함마저 느꼈다. N이 엄마의 기대 때문에 그 나이 또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책을 읽고 있을 때 O은 숲을 마음껏 헤집고 다닐 수 있었다. O은 그렇게 헤매다가 ...
잠을 설치지는 않았다. 중요한 날이지만 완벽할 필요는 없었다. 모든 절차는 끝났고 그는 이 예식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 사람의 서류상 남편이었다. 한두 차례의 실수는 평생 웃을 해프닝이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약간의 흥분, 완전히 평온하다면 거짓말이겠지. 드디어 오늘이다. 결혼식, 그의 인생에도 그 단계가 찾아왔다. 메이크업 샵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신부는 ...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사라진 나무의 이름을 외우거나, 수학 7대 난제의 증명식을 암기하고 있거나, 이제는 모두 무너져 버린 대성당의 양식을 줄줄 읊을 줄 알았다. 인류가 가졌던 유일한 별은 핵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누군가는 땅을 밟으며 우리가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을 다시 싹틔우기 위해 이 캠프 저 캠프를...
(...) 그날은 N의 생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H은 그날 N에게 선물을 주기로 결정했다. H이 그날 선물을 주길 원했다면 그날이 N의 생일이 아닌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태어나는 것만이 축하할 일인 인생은 불행한 거야.” N이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그래도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닐 텐데?” “얘는 선물을 줘도 뭘 그렇게 ...
C은 실패작이라면 가차 없이 용광로에 집어넣는 장인이었다. 제작하는 데 아무리 오래 걸렸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테두리 장식의 나무 열매 숫자가 맞지 않아서, 돋을새김으로 그려 넣은 들짐승이 충분히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약간의 변색과 균형의 뒤틀림이 거슬려서 숙련되지 않은 눈으로 보면 압도당할 만큼 정교한 세공품들은 녹아내렸다. 조수가 걸작을 불구덩이...
4월에 접어드니 이제 제법 봄기운이 훈훈했지만, 아직 밤은 추웠다. 아리아는 얇은 담요를 가져와서 소 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달빛처럼 텔레비전의 드라마가 번쩍였다. 아리아는 경찰들이 형 사 드라마를 못 본다는 소문은 거짓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하는 일의 몇 배는 더 긴박하고 심장을 죄이는 이야기, 그리고 눈을 뗄 수 없는 칼튼 경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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