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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데." 프시케의 대사를 '빌린' 것만 같은 전정국의 말이 끝나자, 나는 맨정신으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놈의 구연동화를 뻔뻔하게 들을 자신이 없었다. 전정국이 나한테서 뭘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놈이 말하는 대상은 누구지? 나는 전정국에게 예쁘다고 말한 적도 없었고, 놈을 잊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날 저런 눈으로 보는...
사실 나는 말이다, 방학이 되면 전정국한테서 좀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놈과 내가 붙어 있는 건 학교에 있을 때가 대부분이니까, 접점이 없어지면 관심도 좀 시들해지지 않을까, 하고. 그것은 존나 나의 오산이었다. 그래그래. 전정국이 체육대회를 취소한 핑계를 날씨로 대자 구린 표정을 지었던 나를 보고는 급히 체육대회를 재개했던 그날 했던 말을 떠올렸어...
가둬준다는 말에 잔뜩 당황해서는, 나는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전정국은 하마터면 코가 깨질 뻔했다.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피하며 허리를 곧추세우는 모습에 되레 내가 움찔했지만, 그런다고 내가 하려던 말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진짜 어느 외딴곳에 갇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씩씩하게 눈에 힘을 주고 나...
내가 미쳤나 보다. 무슨 정신인지 몇 시간째 전정국이 준 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자아도취는 절대 아니고 그냥, 그냥···전정국의 시선이 궁금했다. 잘 찍은 사진인지 작품인지 잘 모르는 내 눈에도 프레임 너머로 애정이 뚝뚝 흐르는 게 보였으니까. "······." 전정국은 나를 좋아한다. 어쩌면 사랑할지도 몰랐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여기서 뭐하세요." "····그게," 전정국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한다. 몸을 살짝 움츠리며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전정국의 어머니는 두 눈을 곱게 접으며 말씀하셨다. "산책하던 중이었단다. 요즘 종아리에 살이 좀 붙은 것 같아서." ····아. 내가 아니었구나. 머쓱함에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그러니까···전정국은 매번 내게만 말을 걸어왔으니까, ...
"선배?" "어? 어····나야 좋지." 얼굴이 빨갛게 물든 날 발견한 전정국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괜히 벽지를 보는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아, 왜 거기서 넷플릭스를 떠올려서는····. 전정국은 하필 또 그 타이밍에 넷플릭스 얘기를 꺼내서는····.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몇 번 해 겨우 진정시켰다. "무슨 영화 보고 싶은데요." ...
문제의 조별 과제 날 이후 전정국은 부쩍 스킨십이 많아졌다. 그전까지는 가끔 손을 잡거나 뺨을 만지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나를 품에 안고, 내 목덜미에 제 고개를 묻어댄다. 이성 교제에만 엄격한 편인 우리 학교는 분명 이성 간의 손잡기까지만 교칙에 허용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누구도 이런 행동을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인정한다. ...
"···괜찮아?" "네, 뭐." 그 말을 하는 전정국의 코는 피로 반쯤 젖은 휴지로 틀어막혀 있다. 그 꼴을 보자 나는 괜히 더 죄스러워 고개만 푹 숙였다. 한참을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괜찮은데." "피가 났는데 뭐가···." 제 코를 이리저리 꾹꾹 만져보던 전정국은 여전히 무심한 태도로 응수한다. 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전정국은 과제를 어디서 하면 좋을지 물어왔다. 그래서 나는 소심하게 우리 집을 말해보았다. "우리 집은 어때···? 너도 저번에 갔었고, 또···어," "선배." "으응?" "전화 오는데." "아, 헐." 나는 급히 폰을 들어 통화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받기 전 얼핏 화면을 보니 엄마였다. 웬만해선 연락을 잘 하지 않는 엄마의 성...
아침 열 시에 왔던 전정국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갔다. 미쳤지, 미쳤어. 엄마는 하나뿐인 딸이 외간 남자와 단둘이 방에, 그렇게나 오래도록 있었는데도 잔소리 하나 없다. "····뭐지." 다시 곱씹어 보니 더 이상하다. 그러게, 엄마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엄마가 있을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부엌을 정리하고 있는 엄마...
미지근해진 쿨패치를 새로 붙이고, 뜨듯한 보리차를 끓여 마시고, 땀 빼게 하려고 보일러는 물론이요 집에 있는 난로란 난로란 다 갖다 놓는 부산스러운 행동들을 다 하고 나자 지친 나는 얼이 빠져 천장만 봤다. "엄마·····지금 몇 시지····?" "열 시. 이제 2교시 시작했겠네. 왜, 학교 가게? 너 지금 상태로는 안 되는 거 알지?" "알아····걍,,...
전정국. 정신이 들자마자 떠오른 이름이었다. 다행히도 저번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절한 게 아니라 전정국 앞에서만 기절한 터라 쪽팔림은 덜했다. 저혈압 때문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깜박거리니 누군가 내 손을 잡아왔다. 깍지까지 일일이 껴가며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한 진득한 모습에 나는 알아차리고야 말았다. 놈이라는 걸. "선배." "·····...
낯설고 역겨운,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건 다 제쳐도, 일단 나는 차도, 자전거도 없다. 언제 꺾일지 모르는 내 허약한 두 다리뿐이지. ···생각해 보니 너무 씁쓸한걸? 이제 보니 전정국은 쇼핑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내 새 교복을 단번에 결제한다. 그것도...
정국은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으며 모든 것을 제 눈에 담았다. 집 앞에 선 태형이 여주를 향해 다가오는 것과, 그가 살가운 얼굴로 여주를 품에 안는 것,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까지. 정국은 그가 여주의 사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정국에게 그런 사실은 영 성가셨다.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정국을 보며 운전기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은, 인간에게 짐승의 발톱이나 두꺼운 가죽 대신 두뇌를 준 게 아니라 아마 적응력을 준 걸 거다. 나만 봐도 그렇다. 벌써 전정국이랑 붙게 된 지 한 달째, 그놈의 존재감에는 적응했으니까. 이제 더는 내 앞자리에 앉아 있어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나는 가만히 앉아 폰으로 요즘 유행한다는(어쩌면 이미 유행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뒷북을 치니까)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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