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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 보면 등산은 되게 멍청한 짓 같아요. 어차피 내려올 길인데. 사람들은 뭐 하러 이렇게 힘들게 오르는 걸까요?」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란 생각보다 단순하다. 민혁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미장센이 좋은, 연출이 훌륭한, 음악이 좋고 배우의 연기가 출중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작품. 물론 그런 것도 당연히 좋은 작품이겠지. 하지만 나머지 아흔...
(연참 2/2) *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2학기 잘 보내고 겨울 워크숍도 파이팅하라고. 나도 내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서로 응원하자고. 그게 다였다. 왁자지껄한 축하나 멋드러진 소감도 없이 싱겁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내게도 별다른 언질이 없었다. 이민혁은 불현듯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고, 서둘러 다른 곳을 보았다....
(연참 1/2) * 나? 글쎄……. 내가 대학로 근처에서 오래 살았거든. 그래서 자연스럽게 연극을 자주 보러 다녔지. 아빠가 연극을 좋아했어. 아, 그건 아니고. 넌 영화 좋아한다고 충무로에 집 구하냐? 아니, 물론 그런 사람이 있을 순 있지. 지구에 70억이 살고 이 좁은 한국에도 5천만이 사는데. 그런 사람 하나 없겠냐? 비하 발언은 아니고. 아니라고!...
* "……너 취했나 보다." 할 수 있는 대꾸라곤 그 정도였다. 솔직히 못 들은 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들었다는 것, 서로가 명명백백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 말의 진의만이 불투명했다. "안 취했어." 이민혁이 한결 또렷해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귓가에 곧장 와 닿은 차분한 목소리에 살짝 소름이 돋는 듯도 했다. 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이민혁의...
* 수많은 맥주잔이 허공에 솟아올랐다. 상석에 선 이민혁만 콜라가 가득 찬 컵을 들고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준 덕에 공연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회비 탕진할 생각들 하시고……." "야, 팔 아파. 조동아리 적당히 나불거리고 짠 해." "짠!" 이민혁의 선창에 모두가 짠, 하며 한 번 더 잔을...
* 공연은 총 2회로 진행된다. 1회차는 오후 2시, 2회차는 오후 7시. 공연 후 뒤풀이까지 끝나면 올해 여름 워크숍도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20분 전부터 입장하면 돼. 초대권 지참한 관객부터." "넵. 근데 초대권 있는 분이 늦게 오셨을 땐요?"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들어가서 객석 스태프한테 말은 해 달라고 전해 줘. 혹시 모르니까 1열 한...
*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언제나 슬픈 장면에는 비가 내린다. 하늘과 약속이나 한 것처럼. 솔직히 그런 설치는 이제 좀 따분하다. 우리는 비라는 감정에 학습된 것이 아닐까. 비는 비일 뿐인데. 창가에 고인 햇빛을 보며 망연히 생각했다. 올해 여름엔 정말 지독하게도 비가 드물다. 정말로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소품도 얼추 준비가 끝났고, 그저께는 다...
* 툭. 손에 힘이 풀렸다. 쥐고 있던 쇼핑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나는 서둘러 문을 놓았다. 그리고 그 문이 닫히거나 말거나, 쇼핑백 안 쿠키가 다 부스러지거나 말거나 도망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보통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고, 상황은 대개 내 바람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흘러...
* D-15.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워크숍의 끝이 보인다. 이 무렵이면 각 팀이 전부 모여 서로의 준비 상태를 공유하고, 공연을 보고, 최종 피드백을 주고받고, 전체 리허설에 돌입한다. 오늘도 그런 명목으로 모인 거였다. 다행히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었고, 이대로라면 공연에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럼 2동 쪽을 돌게." ...
안녕하세요 전주 이씨 이루카입니다 한 해 마무리 잘하고 계신가요 저는 누워서 가요대제전을 보고 있고 약 한 시간 전에 블로그를 업데이트했고.. 뭔가... 뭔가 아쉬운 마음에 써 보는 공지입니다 가 아니라 공지를 가장한 수다입니다 프리텐더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런 나태한 작자의 글을 만나게 되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어? 이거 재개봉했네." 잠시 쉬는 시간, 저녁 삼아 샌드위치를 먹던 때였다.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한 선배가 한마디 툭 던졌다. "뭐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엥? 갑자기? 그런 얘기 못 들었는데." "재동 극장에서." "아, 거기면 뭐. 재개봉이라...
* 최초의 기억이라. 동생과 둘이 집 앞 골목길에 세워진 오토바이에 올라탔던 저녁. 위험한 줄도 모르고 신나서 핸들을 이리저리 흔들다 지지대가 접혔고, 그대로 오토바이가 쓰러졌다. 깔린 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동네가 떠나가라 남매는 울었다. 그제야 엄마가 달려왔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넘어진 남매를 일으켜 세우고,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털어 주었다. ...
* ...119. 혐오하는 존재가 있는가?없을 수도 있나.120.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가?안 받을 수도 있나.121. 상처를 준 적이 있는가?내가 나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다. 이제 백한 개의 질문이 남았다. 그냥 계속 그래 왔듯 덤덤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121번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이런 건 애초에 생각 없이 작성하는 것이다. 문답 목록...
* 너무 황당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웃음처럼 되물었다. “너 도끼병 있어?”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 본인을 안 좋아할 수 있느냐, 뭐 그런 뜻인 것 같은데. 그 흔한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대사를 건넬 셈인가. 갑자기 유기현에게서 확 거리감이 느껴졌다. 쟤 원래 저런 캐릭터였나. “아니. 그런 ...
* 전화벨 소리에 깨 버렸다. 엄마. 숙취가 이제서야 올라오는지 머리가 깨질 듯한데 그 두 글자를 보니 한층 더 골치 아팠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몇 초 더 버티다가 겨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아직도 자고 있느냐는 잔소리부터 쏟아졌다. 해가 중천이긴 했다. "일어나려고 했어." [너 집에 안 내려올 거야? 종강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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