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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있었던 매각교단원의 수작질을 떠올리다 말고 철범은 해일의 행색을 다시금 훑었다. 아직도 병색이 완연함에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 꼭 직위에 걸맞았다. 천주대 단장 김해일. 신부로서 고아했던 분위기와 달리 이제는 무신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간혹 영력이 번뜩이는 새카만 눈동자, 짙은 눈썹, 사내답게 뻗은 기골에 군더더기 없는 살집. ...
행적들 중에 잘못 행한 것들이 있나 돌이켰다. 해일은 가물거리는 눈가를 누르며 자리 구석까지 몸을 숨겼다. 스산해진 밤 울음이 창호문을 뒤흔든다. 눈이 없는 시체, 손가락이 없는 아이들, 걸음 걸음마다 진탕 피 없이 흘러내리는 생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한 점 후회없이 살아 볼 것을. 품에 갈무리 해두었던 묵주를 꺼내어 움켜쥐었다. 천주단장에 걸맞게 신...
조선 중기 나라 안팎으로 시끄러웠으나, 왜놈이고 오랑캐고 산 하나를 꼬박 넘지 못해 조선 팔도로 발 들이기 어려웠다. 중원에만 있다던 괴력난신(怪力亂神)이 조선에서 움터 이립(而立서른)이 채 되기 전에 함선 서른 아홉 척, 백명 부대를 홀로 일곱 번이나 막았다는 풍문이 태백과 백두대간을 타고 국경을 넘었기 때문이다. 젊은 무신(武神)이 이룬 쾌거에 천하는 ...
빵 조각을 입에 물곤 언제 빨았는지 모를 냄새가 나는 담요를 두르고 온 구대영과 쏭삭은 각 거실과 다락을 바꾸어 경계를 섰다. 정확히는 구대영만 난간에 걸쳐져선 질겅질겅 빵을 씹으며 애매한 보초를 섰다. 한 건이라도 성과를 내기 전 까지는 쉬지 않겠다며 결의를 다지던 쏭삭은 황철범에게 쿠사리를 대차게 먹은 뒤에야 응급 처치를 받았다. '세컨드에 남아서 뭘...
어느 날 세상은 붕괴했다. 기울어지는 배 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침잠했다. 모든 생명체의 딱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그 때에 세상은 슬픔에 잠겼다. 산 너머로 해가 졌다가, 그 이튿날은 뜨지 않았다. 급강하 하는 기온과 이상 현상에 더불어 세계는 요동쳤다. 예기치 못한 현상에 모든 것이 정지했다. 사고, 사상, 종교, 자유, 경제, 정치, 문화와...
ㅡ 찌르르르. 개체당 생존 시간이 7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매미 우는 소리에 잠을 깨는건 으레 있는 일이다. 중국 매미가 배에 붙어왔다더만 맴맴 익숙한 소리가 아니라 요란한 경적처럼 방충망에 붙어 울어젖혔다. 알람 시계도 아닌 것을 한대 쳐서 끌 수도 없고. 곧 고꾸라질듯 고개를 꺾으며 돌아가는 파란 선풍기도 탈탈 모터를 들치며 돌아가는 소리 또한 시끄러웠다...
먼 뱃고동소리, 선사에 빼곡한 컨테이너 박스. 수리한 표 가운데 가장 승객이 적은 배편에 올라 우리는 이중권 일당이 약을 친 곳으로 향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짠 내음이 물씬 풍겨 오는 바닷가가 질리지도 않는 모양으로, 김해일은 선상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하고 싶은 말이 있던게 분명했는데, 앓...
때로, 아니 어쩌면 대다수 사람들은 반추하고 기억을 곱씹을 때 가장 좋지 않은 것들만을 떠올릴 것이다. 물건이라면 잃어버렸던 기억, 장소는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기억까지도. "해일아, 필승." "이중권!" 하물며 사람이란. 다소 초조해보이는 낯으로 모니터와 회의실 밖에 서 있는 저를 돌아보던 통신 담당은 누군가의 손짓으로 버튼을 눌러 분석을 재개...
기억이 정렬되는 순서는 시간 순이 아니라 얼마나 깊숙하게 새겨졌는지에 따라 달랐다. 두서없이 떠오르다 흩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십대 후반이었다가, 정처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서른 하나였다가, 그리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단조로운 회색 건물 앞에서 마주했다. 온 몸이 물을 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꿈을 꿨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찰나...
작전 나간다는 말을 일반 직장으로 치환하면 뻑내면 죽을 일을 받는 다는 것과 같다. 국내현장1, 2팀, 해외 비상TF1팀 그리고 정보1팀 즉시 현장 집합. 요컨대 얼굴도 모르는 타부서 사람들이랑 지지고 볶자는 뜻이다. 정보1팀 김해일 밑으로 현장감시 김인경, 구대영이 모니터링 업무. 전산통신 오요한, 통신분석 서승아, 구대영. 드러나는 바깥은 국내현장팀과 ...
'황철범? 저 새끼 저거 몇번째여.' '몰러, 먼젓번엔 여수 중앙청사서 저렇게 뛰당겼다네.' '뭐 정신과 기록은 읎제?' 수런거리는 말도 듣지 못한채로 남아있는 흔적이 있을까 싶어 뛰었다. 어느 날은 비가 왔고, 어느 날에는 진눈깨비가 왔다. 얼지도 녹지도 못한 것이 희게 내리다가 발 밑에 고여 철벅거렸다. 없는 사람. 신원 조회 불가. 중부서 발령 기록 ...
월차 개념도 없고, 복지도 없고. 아무렴 숙취로 빠지는건 어불성설. 현장팀에서 요청을 하면 지정된 장소로 옮겨서 데이터 백업을 하는 대신 일거수일투족이 본사 상황실로 모니터링되고. 규정 12번의 세부 내역들을 살펴보면서 철범은 혀를 내둘렀다. 이거 순 명예직이었구만. 겉에서 보기에야 번드르르 하지마는 정작 내부에서 종사하면 그냥 일반 악덕 기업에 종사하는 ...
2009년 그맘때 철범은 잠시 강서에서 발령이 났다던 형사와 협업을 했었다. 유배를 왔댔나, 뭐랬더라. 2팀에 배치되었음에도 서 사람들의 시선을 죄다 끌어모을만치 강렬했다. 특이하게 책임감이 강한 동시에, 수감되어온 사람들을 보면 휘발유통에 불이라도 붙은 것 처럼 화를 냈다. 저 놈 혈관은 쇠심줄로 되어있는가보다. 저렇게 지랄해대면 분명 홧병으로 뒤로 넘어...
때로 인생에는 시린 바람이 불었다. 근데 어느 날은 존나게 뼈가 얼어 붙도록 불었다. 굴곡 많은 세월, 어느 누구는 평생을 잔잔하니 수평선처럼 뻗은 곧은 길 위만 걸어가다 삶을 쫑낸다는데. 철범에겐 시험도, 사랑도, 하다못해 경찰 생활도 좀체 순탄치 못했다. 동생 하나는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주워 듣고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가 보라며 명함 하나 쥐여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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