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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을 숙淑에 어질 현賢, 삼십년 전 숙현의 부모는 말 그대로 맑고 어질게淑賢 자라나기를 바라며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지었다. 딸은 그들의 바람대로 깨끗하고, 투명하고, 티끌 하나 없이 컸다. 부모의 말을 유순히 따랐고 학교에서 성적으로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교사와 친구들에게 크게 대들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숙현은 밝고, 의심이 없고, 있...
내 친구 세리는 아주 친한 친구입니다. 내가 아는 친구 중에서 제일 오래 됐고, 제일 친한 친구입니다. 우리는 정말 친해서 서로 단짝 친구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우리는 7살 때 처음 만났습니다. 지금이 초등학교 5학년이니까 벌써 6년이나 되었습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엄마 말로는 유치원에서 한 반이 되자마자 서로 손을 꼭 잡고 항상 같이 다녔다고 했습니다...
한 시간 여의 야밤 노동은 단순히 거울을 집어드는 데서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휴대폰을 만지다 이쯤 되면 오늘 할 일을 해야겠다 싶어 책상 앞에 앉았는데, 오늘의 스터디플래너를 (밤 9시에) 적기 위해 책상 한 켠 필기구함을 뒤졌는데, 오늘따라 평소엔 신경쓰이지도 않았던 손거울이 보일 게 뭐람. 하얀 필기구 정리함에 꽂혀있는 하얀 손거울은 그 존재감이 극히...
껌뻑거리는 눈꺼풀의 무게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이릉은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머리는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와중에도 이릉은 자신을 따라온 듯한 냄새를 확인하기 위해 몇 번이나 코를 킁킁거렸다. 과도한 들숨으로 건조해진 이릉의 코 안쪽 점막이 말라붙기 일보 직전이다. 희미한 악취가 이릉의 코 안으로 들러붙는다. 지금 당장 어디 몸이라도 뉘여야...
어두운 밤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남겨진 부재중 전화 3통을 연달아 해치웠다. 모든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니 비로소 나만의 시간이다. 십분 남짓 남겨진 시간 동안 오늘 나눴던 두 시간 여의 대화를 곱씹어 봤다. 작년 우연찮은 기회로 만나게 된 상담사는 매우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상담사도 한낱 인간일 뿐이라 그들이 하는 말에 전문성은 있을지언정 상담사 본인의 개...
배기, 지금 바쁘나요? 알 수 없는 이상물체가 나타났어요. 네, 지금 당장이요.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주세요. 같이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다간 폭발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물질이예요. 아주 수상하다고요. 고마워요, 이렇게 빨리 와주다니. 저기 저걸 보라고요. 길쭉한 원통이예요. 네, 맞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끈...
아침 일찍 이사를 마치고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짐 정리를 하느라 오늘 글쓰기는 포기해야겠다 싶었는데, 오늘의 기억을 꼭 남기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 아직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았고 책상 정리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생생한 느낌, 전후의 비교, 순간 오가는 미묘한 감정들은 오늘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기에 우선 순위를 뒤바꿨다. 아직 덜 풀러진 '귀중품...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우희는 기가 막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다. 오후에 여유롭게 시작해 지금쯤이면 당연히 끝났어야 할 입주 청소가 아무 것도 진행된 게 없다니! 당장 업체 사장에게 전화 걸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우희는 텅 빈 집 이곳 저곳을 조심성 있게 둘러보았다. 여기도, 저기도 아직 먼지와 땟자국이 가득하다. 손가락으로 베란다 창틀을 한...
4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이사 형태의 결정이었다. 포장 이사를 할 것인가, 반포장 이사를 할 것인가. 체력이 충분하고 짐도 적다면 여태껏 그랬던 대로 반포장 이사였겠지만, 집 안을 슬쩍 둘러봐도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세간살이에 바로 포장 이사를 선택했다. 아무리 포장 이사라 해도 개략적인 아웃라인은 잡아두어야 하기에 이번...
생긴대로 산다 했던가, 나이 들수록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통상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가상 세계의 바이트로만 존재하는 이릉에게는 존엄한 가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반전의 가치, 알고보니 보석이었던 가치, 짜증나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길냥이를 거둔다던지 수년 째 극빈국의 아이에게 후원을 해주고 있다던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가상인물이...
"언제 이런 소리 그만할 거냐고요? 내 업무가 널널해 질 때 까지요." 한 번 적당히 끊어주지 않으면 한도 끝도 없이 불평을 토해낼 것 같아 '도대체 그런 소린 언제까지 할 거냐'라고 물으니 대뜸 돌아오는 대답이 저거다. 이릉은 손목 시계를 가만히 노려봤다. 벌써 5분이나 지나다니, 추진해야 할 업무보다 이런 소모적인 대화에 5분이나 사용하다니. 새로운 만...
급격하게 몰려오는 노곤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이릉의 눈꺼풀이 느리게 한 번, 두 번 끔뻑거리다 기어코 상체가 고꾸라지고 말았다. 뱃 속에 아직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이 얹힐까 싶어 위장 쪽을 최대한 편평히 유지하며 이릉은 생각했다. '뭣 하자고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지.' 빈곤한 체력은 근육의 부재로부터 나오는 법, 한 때 근육이 꽉 들어차 있었지만 지금은 ...
매일 아침마다 나에게 부여하는 주술적 행위인 '데일리 타로 카드 뽑기'에서 예상치도 못하게 툭 튀어나온 카드가 '10 오브 소드'였을 때 과연 이게 무슨 뜻일까 잠시 잠깐 골똘히 생각했었다. 최근 들어 명백하게 성실히 루틴을 지켜 생활하고 있었고, 단 하루도 게으름 부리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적개심을 품거나 옹졸하게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
딱딱하고 단정한 어조, 통신어체를 최대한 배제한 정결한 문장. 어느 곳에 기고 하기 위함도 아니요, 누군가에게보여지기 위함도 아니다. 그간 거리를 두고 살았던 '내면의 사색'을 다시 한 번 습관화 하기 위한 글쓰기 시작이라니 참 오래도 돌아왔다. 일부러 맞춤법을 틀려가기도 하고 자그마한 모바일 쿼티 자판을 조작하기도 귀찮아 쌍자음 받침조차 홑자음으로 대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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