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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이라기엔 너무도 더웠던 어느 날, 마요이는 땀의 찝찝함과 냄새가 날 것 같다는 불안을 못 이겨 가볍게 샤워를 했다. 커플로 산 여름 잠옷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채 화장실에서 나온 마요이는, 혹여나 수건이 흘러내릴까 봐 손으로 쥐고는 화장실의 물기를 꼼꼼히 닦아냈다. 그 모습을, 선풍기 앞에서 더위를 식히던 타츠미가 모두 보고 있었다. 귀...
네임버스: 사람의 신체에 ‘운명의 상대’의 이름이나 이니셜이 적혀 있다는 세계관. 위치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소울본딩을 통해 서로를 귀속할 수 있다. 운명의 상대가 가까이 있는 경우에는 이름이 선명해지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는 등의 신체변화가 일어나며 반짝이기도 한다. “끄악.” 쿵, 하는 소리가 천장에서 들려왔다. 천장 바로 밑의 방에 있던 아이라는 놀라...
각설탕을 입에 넣었다. 습관이었다. 지나치게 달콤해, 입안이 텁텁해지는 이 맛을, 난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던 건 너였고, 난 너와 어떻게든 공통점을 만들려고 각설탕을 먹어댔다. 그 날도 넌 학교 간식 시간에 각설탕을 담은 통을 꺼냈었다. 반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의 간식을 뺏어 먹던 남자아이가 너는 왜 매일 각설탕만 먹냐고, 이상하다며 너를 괴롭혔고...
제비꽃 마녀는 예술을 좋아했다. 특히,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춤을 가장 좋아했고, 몇백 년 동안 살아오며 번 돈으로 장르에 상관없이 춤을 추는 사람들을 위한 후원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사는 제비꽃밭 근처의 마을에서는 매년 그의 후원에 보답하는 공연이 열리곤 했다. 입장료가 정해져 있지 않은 공연으로, 수익금은 모두 각종 사회적...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두어 번 벌렸다 닫았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시고 싶었지만, 몸을 일으키면 눈앞의 너가 사라질까 봐 그러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너를 다시 만나면,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왜 지금의 이 감정들이 문장...
아야세 마요이는 저의 위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 어둠 속에서만 살아온, 음침하고 더러운 저는, 결코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다. 욕망을 참지 못한 결과로 이렇게 아이돌을 하게 되었지만... 저는 그저 빛이 더욱 빛날 수 있기 위한 그림자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마음은 지워야 한다. 빛을 보며 애정을 갖는 건 저의 일상이었다. 그...
너가 죽었단다, 너와 꼭 닮은 형제가 너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다. 너가 죽었다고 했다, 사인은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충격을 받을까 걱정되어서라고 했다. 그러니까, 돌려서 말한 거다, 너가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것을. 나는, 그저 멍한 기분에 가두어져, 그 투명한 방울 속에서, 현실감각을 잃었다. 아무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너의 형제가...
꿈을 꿨다. 언제나처럼 자각몽이었고, 이번 배경은 우주였다. 나는 아주 천천히, 사람의 속도로 우주를 유영하는 무언가가 되어, 눈앞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자각몽은 특이하다. 꿈이란 걸 자각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마치 내가 이 꿈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의 꿈인 것처럼, 그저 자각만 한 채,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
눈앞에서 바스러졌다. 낙엽을 밟은 발이, 바닥에 앞코를 마구 비볐다. 그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내 눈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다시 붙일 수도 없게, 어느 부분은 가루가 되도록.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네가, 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뒤늦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닥에 있는 먼지와 같이, 구분도 안 되는 잔해를...
뻐끔, 뻐끔, 나는 수조 안의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었다. 금붕어는 뻐끔, 뻐끔거리며 먹이를 받아먹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공허한 눈. 나는 그 눈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생각을 알지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를 사랑했지만, 좋아하진 않았다. “...네 주인은 어디 갔을까, 금붕아.” 정말 사소한 이유였...
구름 한 점 없기를. 받을 이를 정하지 않고 읊은 기도가 끝이 났다. 너는 눈을 떴고, 맺힌 눈물을 닦았다. 내가 들은 것을 떠올려 보았다. 아... 이미, 아무도 모르는 수신자에게 도착한 걸까. 끝의, 인생에 구름 한 점 없기를, 만 떠오를 뿐이었다. 누구의 인생을 말하던 것이었을까. 이미 떠나버린 말은, 사라진 이름은, 알 길이 없다. 너를 보았다. 너...
우리는 모두 길을 잃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목적지는 점점 멀어져 갔고, 본 적 없는 풍경들이 즐비해 있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탓했다. 그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말리던 사람들 중 몇 명도 휘말려 싸웠다. 그렇게, 우리 중 일곱이 발걸음을 멈췄다. 남은 우리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도착 장소도 정하지 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 나아...
악마다.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본다. 악마야. 두 번째는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우리를 벌하러 온 거야. 아냐, 우리를 괴롭히러 왔어. 뭐든 간에, 우리는 죽을 거야. 이후, 얼마 간의 정적. 사람들의 공포로 무거운 침묵을 깬 건, 누군가의 비명. 그게 어떠한 신호라도 되는 듯, 모두가 뒤를 돌아 도망간다. 잠겨있...
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곧게 서 있는 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갈대처럼. 태풍이 불어도 부러질 걱정은 없겠다고, 그가 농담한다. 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뒤이어, 그가 발을 구른다. 물에 젖은 부드러운 땅에, 구멍이 파인다. 푹, 푹, 발목까지 잠기고 계속 파고든다. 한 발이 ...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그건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먼저 바라보지 않으면 공격당하니까. 누군가 이유를 물어보면 항상 그렇게만 답하곤 했다. 누구에게, 왜 공격당하는진, 아무리 물어도 답하지 않았다. 처음, 사람들은 그를 따라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당연히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모서리일 뿐이었다. 그를 공격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경성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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