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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왔다. 관광은 아니고. 별 뜻은 아니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왔고, 특별한 목적지도 목표도 없다는 말이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촌각을 다툴만큼 급한 일도 없어서. 내키는대로 여기 저기 다녀보고 있다. 길을 걷다 괜찮은 식당이나 까페를 발견하면 기억해 두었다가 내킬 때 가보는. 오늘 들른 까페는 기대치와는 조금 달랐다. 야외석이 괜찮아...
당연하게도, 살다보면 여러가지 이유로 힘들다. 공부를 잘 하면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럽고, 못 하면 못하는대로 자신감이 떨어지고. 취직을 못하면 불안한 미래가 걱정되고, 취업 성공 후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 땐 사람에 치이는데, 없으면 또 외롭다. 결혼이라고 다른가, 못해서 안달나다가도 하고 나면 이걸 왜 했나 싶고. 그냥 ...
누군가 나에게 슬프게 본 영화를 꼽아보라고 했을 때, 그리고 내가 몇 개의 영화 제목을 말했을 때,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루퍼트 와이어트)’과 ‘늑대아이(호소다 마모루)’다. 두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나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두 영화 모두 마지막 장면이 이별인데,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친밀했던 이와의 이별이다...
나는 주기적으로 불안하다. 아무 이유 없이. 특별한 걱정거리가 없는 데도. 걱정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겠다는, 걱정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나의 불안이 괴롭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예측도 예방도 안된다. 불안한 이유가 무얼까 생각해봤다. 미래의 불확실성? 남들과의 비교? 잘 해야 한다는 강...
히야. 씁. 흠. 성원과 현우가 번갈아가며 추임새를 넣었다. 저건.. 아무리봐도 적응이 안되는 모습인데? 도저히 눈에 익을 것 같지 않은 그 모습은, 앞치마를 두르고 후라이팬을 든 윤기다. 어느 주말 저녁. 윤기가 성원과 현우를 집으로 초대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윤기의 집에 종종 들르는 두 사람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정식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이...
오랜만에 하는 TV 촬영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빈 대기실에 앉아있자니 피로가 몰려오는 윤기다. 아직 촬영은 시작도 하기 전인데 말이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건데?' 피로로 멍해진 윤기의 머리 속을, 성원의 목소리가 가르고 들어왔다.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건데? 어느 밤, 성원이 무심코 물었었다. 그러게.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탁. 문 닫...
월요일 점심 시간. 식당은 직장인들로 붐볐다. 정국 지민 강운이 앉은 네모난 테이블까지 고소한 기름냄새가 퍼지자, 정국이 기대에 찬 눈을 빛냈다. "아. 배고파. 두 개도 먹을 거 같아요" 세 남자는 11시쯤 한 회의실로 소집되었다. 정 이사의 부름이었다. 용건은 위층에서 떨어진 긴급 프로젝트. 셋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일단 밥이나 먹고 힘이나 내자고, 법인...
지민, 윤기 두 사람 다 확실히 으른이 되긴 했는지 전보다 연애 진도가 빨랐다. 예전엔 첫 키스를 하는데 만도 몇 달은 걸린 거 같은데, 다시 만난지 한달이 좀 넘어 입을 맞대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다음부터는 고속도로 탄 듯 거침이 없었는데, 사귀자고 쾅쾅 도장 찍은 날부터 섹스를 했다. 한동안 칼퇴를 하던 지민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종종 야...
윤기는 호구가 되겠다더니 실업자까지 될 심산인 듯 했다. 백수 마냥 매일같이 지민의 회사를 찾았다. 5시 55분만 되면 지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만나서 하는 일은 매일 똑같았다. 함께 저녁을 먹고 윤기가 지민을 집 앞 까지 데려다 주면, 차 안에서 애틋한 키스를 하다가 아쉬움에 헤어지는 것. 그런데 지민은 짧은 만남도 짧은 만남이지...
월요일 아침 지민은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회사에 도착했다. 주말에는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월요일이 되어 사무실에 갈 생각을 하니 퍼뜩 강운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다. 윤기 옆에 선 지민을 보던 놀란 눈. 윤기에게 잡힌 지민의 팔을 보던 아련함. 서운해하는 기색을 뻔히 읽었는데,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하지는 못할 것 같다. 지민은 그 정도로 뻔뻔...
지민의 집에서 나온 윤기가 향한 곳은 탄이동이었다. 목적은 분명했다. 김남준 잡으러. "다 알고 왔어. 그냥 말해" "지민이가 어제도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너는 임마, 그렇다고 형을 몇 년이나 속여?" "속이긴 뭘 속였다 그래. 누가 들으면 출생의 비밀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러니까 빨리 말해, 임마" 지민이가 진짜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
토요일 오후. 윤기와 지민이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 되었다. 지민은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서서 윤기를 기다리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남준이형. 저예요, 지민이" "응. 지민아. 잘 지내지?" "형이 윤기형한테 말해줬어요? 저 어디서 일하는지" "응. 한달 전 쯤인가 전화가 왔었어. 갑자기 궁금하다면서 물어보...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2층 창가에 서 있던 지민이 공장 입구로 들어서는 빨간색 스포츠카를 발견하고는 절래절래 고개를 저었다. 윤기가 TS벤처를 다녀간 다음 날. 지민은 정 이사의 방으로 찾아갔었다. 저는 윤기의 투자처를 찾아 줄 적임자가 아닌 것 같다고 똑부러지게 말했지만, 당연하게도 거절을 거절당했다. 정 이사도 처음에는 '별 거 없어. 그냥 업체...
사무실 한 가운데. 사람들이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모여 있었다. 항상 조용하던 곳인데. 오랜만에 시끌시끌 즐거운 소리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예요?" 외근을 하고 사무실로 들어오던 정국이 둥글게 모여선 사람들 중 하나에게 물었다. "안젤라 내일부터 출산 휴가 들어간대요. 베이비 샤워 중" 그러고 보니 테이블 위에 꼬까신 모양의 케이크가 올려져 있다. 그...
정국이 보기에 지민은 어딘가 맹한 면이 있었다. 순진하다고 해야할지 둔하다고 해야할지. "거봐요. 오늘은 딱히 업데이트할 게 없다니까" 지민이 볼멘 소리를 했다. 월요일 아침부터 시바 대리가 회의를 해야겠다며 정국과 지민을 부른 탓이다. 무슨 이슈라도 터졌나 싶어 가보니 그냥 데일리 미팅이란다. 업무 진행 현황 같은 거라면 딱히 공유할 것도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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