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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園, 未踏. 툭, 툭, 툭.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이 아래로 떨어진다. 깨끗하다면 깨끗하고 허전하다면 허전할 넓다란 벽 위, 동그마니 달린 외곽을 눈으로 덧그렸다. 툭, 툭, 툭. 그러며 나도 모르게 발 앞꿈치를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안정감을 찾기 위함이다. 수 초간 편안한 적막을 유지하던 영현이 펜으로 차트 귀퉁이를 가볍게 쳐 패턴을 끊어냈다. 사려 깊은...
벤이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적어도 9시 30분까지는 그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소한 변화 하나하나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전직 히어로이자 암살자 출신인 그가 더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첫 번째는 벤과 한 침대를 쓰는 관계가 된 이후 생애 처음 심리적 안정기에 접어든 파이브의 기상 시간이 점차 ...
1. 자, 여기 당신이 잘 아는 첼시 갤러리 디스트릭트다. 태초에 앤디 워홀 팩토리가 있으라. 이제는 가고시안이 있고 데이비드 즈워너가 있고 뉴욕 현대 미술관이 있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이 그 큼지막한 블럭 사이를 조밀하게 메우고 있다. 빛나거나 져버리거나 빛 한 줌 보지 못한 이들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고 끝에 마침내, 뜨고 지고 나타났다 스...
13.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근래 들어 다시 고민해본 적이 있다. 세상의 중심이 나요 곧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던 사춘기야 지나도 한참 지났지만, 방향키조차 내 손아귀 안에 쥘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쯤 되니 마구잡이로 돌아가는 뱃머리를 바라보다 멀미로 토악질을 할 판국이다. 구역감...
12. “나한테 옷이 이렇게 없었나?” 벤이 옷장 앞에 서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이전 직장은 CEO의 시대착오적이고 고집스러운 방침으로 최대 타협점이 비즈니스 캐주얼이었던터라, 막상 자율복장이라고 하니 이상하게 입을 옷이 없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오늘따라 입을 옷이 없었다. 이 니트는 어제 입었고 저 스웨트셔츠는 그저께 입었다. 무난하기 그지 ...
11. 사건 이후로 파이브는 직원 보호라는 명목 하에 벤을 유난스레 경호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있었던 총격전 이후로 종종 출퇴근을 함께 하게 된 거야 제법 된 일이지만, 이제는 그 수준이 아니었다. 어딜 가나 따라붙는 은근한 시선과 이따금 제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에 벤은 파파라치에게 시달리는 셀럽의 삶을 살아야 했다. 소심히 거부해보았으나 자꾸만...
10. 지나치게 많이 돌려봐서 늘어져 버린 비디오테이프나 빠르게 감은 동영상처럼 눈앞이 마구 엉키다가 느려지더니 또 빨라졌다. 벤은 생각했다. 내가 느린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너무 빠른 거라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저 세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가 대체 왜 이 개박살이 나는 중인 다이너에 아직 있느냐 하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다. ...
9. 형제라면 모름지기 전투하기 마련이다. 뱃속에서 나는 순간부터 얕게는 장난감 한 개, 깊게는 부모의 애정을 두고 때로 목숨 걸어 대치하는 것이 형제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게 평범한 형제의 모습이라면 대니얼 민과 벤자민 민은 틀을 조금 벗어나 있었다. 동화처럼 화목하진 않았지만 둘은 서로를 드러내 아꼈으니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8. “베네리노, 이 틈을 타서 빨리 털어놔 봐. 사장님이 너한테 뭐 빚졌어?” “예?” 그런대로 평화로운 오후, 클라우스의 난데없는 발언에 벤에게로 이목이 죄 쏠렸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벤이 파이브에게 빚을 졌으면 졌지 파이브가 벤에게 무슨 빚을 지겠나? 벤이 황당한 눈초리로 외근을 나가 비어있는 파이브의 책상을 힐끗 봤다가 다시 클라우스에...
7.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난데없이 비가 내렸다. 대개 맑은 캘리포니아에 하필 오늘 비라니. 벤은 백팩을 꼭 끌어안은채 희멀건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것도 어쩌면 불길한 징조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또 다른 불길한 징조가 뭐가 있느냐 하면 어제 사격 연습에서 유독 빗나가던 총알, 완전히 실패한 점심 메뉴 선택, 4시 44분을 두...
6. 탕, 파이브가 테이블에 붙은 버저를 누르자 인간의 형상을 한 사격용 패널이 코앞으로 쑥 밀려왔다. 벤이 총을 내려두고 귀마개와 고글을 벗으며 그것을 살폈다. 분명히 심장을 겨냥했는데 죄 빗맞아있다. 팔, 목, 배, 다리, 그리고 과녁 밖. 벤은 잠시 침묵하다 어이가 없어 실실댔다.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파이브가 뭘 잘했다고 웃어, 하고...
5. 명복을 빌지. 아끼는 후배 가는 길에 선배로서 배웅해줘야 하지 않겠나. 말 조심해, 똑같은 꼴 나기 싫으면. …넥타이가 삐뚤어졌군. 벤이 헛숨을 들이키며 깨어났다. 실로 오랜만의 악몽이다. 잊어가는 줄 알았더니 접어두었던 기억이 살인을 의뢰하며 뇌의 회로에 다시 찾아든 게 분명했다. 간사하다.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 자극적이다. 악몽은 길몽보다 강...
4. “샷 추가하신 아이스 카페 라떼랑 아몬드 크루아상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상냥하고도 드라이한 대화가 좋다. 벤은 그게 참 새삼스러워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적절하고 무해한 백색소음과 저마다의 일이 있는 사람들. 한 구역 내 서로 고작 일이마일 간격으로 스타벅스가 다섯개쯤 있는 이 혼잡한 도시에서, 스쳐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로 ...
3. 지금 벤은 쫓기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벤과 파이브가 쫓기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난데없는 상황인고 하니 벤 자신도 잘은 몰랐다. 타겟을 죽이러—파이브가 죽이고 벤은 한 대 패러—가는 길, 하필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하고 그 참에 커피도 샀다. 나란히 걸어 다시 차를 타러 가는 데 난데없이 파이브가 종이컵을 내던지고 벤의 손목을 낚아채며 외쳤다. 뛰어요! ...
2. 풀을 뜯는 동물 마냥 유순한 얼굴로 날린 어퍼컷에 파이브는 답지 않게 잠시 혼란을 겪어야 했다. 토끼가 싸울 때에는 얼굴을 초당 5회까지 때릴 수 있습니다… 클라우스가 언젠가 틀어두었던 다큐멘터리가 뇌리를 스친다. 그가 빠르게 상념에서 벗어나 타겟을 죽이려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벤은 대단히 예의 바른 말투로 죄송하지만 그건 묻지 말아 주시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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