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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몇 분 뛰었다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간신히 찾은 그늘 밑에서 숨을 고르던 호열은 이미 풀어지기 시작한 머리를 살짝 건들였다. 사방이 어두운 오락실의 싸구려 형광등 밑에 있다 태양을 마주하니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오, 노구식. 저긴 구석이라 오는 애들 별로 없다며. 아직까지 맴도는 담배냄새에 호열이 셔츠깃을 짜증스럽게 펄럭였다. ...
* 사망소재가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양호열에게 당신은 귀신이나 영혼, 이런걸 믿냐고 묻는다면 양호열은 단박에 아니라고 답하며 비웃을 것이다. 적어도, 양호열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첫사랑, 강백호가 미국에서 출국 전날 밤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때,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를 도와주다가 음주 운전자가 몰던 트럭에 부딪쳐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
그러니까, 방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방향을 아무리 바꿔도, 결국 내 목적지는 너였다. 너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랜만에 너를 만나러 가며, 몇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VECTOR “호열아. 우린 여기까지인 것 같다.” 날씨가 좋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같이 오랜만에...
*실종, 사망, 간접적인 인종차별, 경미한 질식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he Carpenters의 ‘Yesterday once more’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온갖 서류로 어수선하고 말라붙은 커피 자국투성이인 책상에는 연구실 분위기와 동떨어진 구식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큼지막한 두 개의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잡음이 섞였으나 멜로디가 퍽 ...
* 재난(가뭄)으로 인한 범죄의 일상화 주의, 흡혈 및 식인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동쪽으로 향한다. 사막의 별 세상에서 갑자기 물이 사라졌다. 기후에 의한 자연스러운 변화가 아니었다. 바다와 강, 호수가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그날은 새벽이 다 가도록 사이렌이 울렸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일주일도 채 되...
매끄러운 백상지 위, 연붉게 내뻗은 연직이 종과 횡으로 교차하며 칸으로 맺는다. 줄지어 늘어선 정사각의 공백마다로 목필이 스칠 적마다 그을음으로 남는 자취들은 꼭 연심과 닮아 있더랬다. 날붙이로 성심껏 다듬어낸 흑심이란 마냥 강직한 듯싶으면서도 어쩜 이리도 무르기 짝이 없으며 미련스럽게도 물자욱에 번져 씻길 줄도 모르는지. 켜켜이 해묵어 그저 그런 검댕...
일이 있어 몇 달 다른 곳에서 지내야 했다. 여행 같다는 생각을 한 백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캐리어를 끌고 큰 보폭으로 걸어간다. 잠시 머물 새로운 집, 새로운 환경, 새롭게 만날 사람들이 기대되었다. 어떻게 해야 끝내주게 놀 수 있을지 백호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산더미 같았지만, 일 생각은 완벽하게 배제한 채로. 꼼꼼한...
빨간머리 반항아가 세상을 놀라게 할 스포츠맨이 되는 걸 모두에게 보여주자고. 새로 개업한 클럽에 상납금을 받으러 가기 전,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간 일행을 기다리던 호열의 시선이 향한 건 편의점 바로 옆에 있는 전자제품 상가의 프로모션용 TV였다. TV속에선 익숙한 장면이 나온다. 들어본 적 있는 두 팀의 경기는 1분을 남기고 격전 중이다. 한 치의 양보도...
세상에는 법칙이라는 게 있다. 구름이 끼면 비가 오는 흔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건 법칙이라기보단 이치에 가깝지. 그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것들. 왜,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우산을 안 가져온 날에 하필 비가 오고, 버스에서 바꿔 선 자리에는 죽어도 앉을 수 없는 그런 일들. 사실은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더라도 더욱 ‘하필’처럼 느껴지게 되는,...
바텐더: Bar+tender. “풀이하자면, 바(bar)에서 손님을 편안하게(tender)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바에 방문한 손님의 입맛에 맞게 각종 술에 향신료, 과일, 크림등을 혼합하여 칵테일을 만들어 주거나, 손님이 보는 앞에서 셰이커를 흔드는 등 제조 연출등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여 손님을 즐겁게, 편안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출처: DRI...
골목길에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웃다 못해 우는 지경에 이른 대남이 눈가를 문질러 닦았고 그 옆의 용팔은 아직도 배를 잡고 낄낄대고 있었다. 제일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구식은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백호의 발이 쿵쿵 소리를 냈고, 백호 옆의 호열은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백호의 입술이 점점 삐죽 나오는 것을...
낯선 천장이다. …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양호열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어째선지 교사도 없이 비어있는 보건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덮여 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리고 보건실 특유의 싸구려 라벤더 방향제 냄새가 훅 느껴졌다. 양키답게 보건실이라면 수업 빼먹을 때마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는데 오늘은 침대도 벽지도 천...
*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표현 주의, 사망과 환생 소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고래가 가는 길은 인어가 가는 길로 고래를 목격하면 인어를 볼 수 있다는 전설이 말이다. 그리고 인어를 보게 되면 그 배는 만선이 된다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전설 또한 있었다. 지금은 인어가 노래로 사람을 홀려 배를 침몰시키는 존재로서 알고 있지...
* 등장인물의 부상, 사망 소재가 존재합니다. 역시 연명 치료는 계속하고 싶습니다. 초췌한 낯을 한 호열이 단호히 잘라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꾹 다물린 입매는 언뜻 고집스럽다. 맞은편에 앉은 의료진은 난색을 보인다. 여러 번 안내해 드렸지만, 이제 더 시도할 수 있는 치료법은 현대 의학 수준으로는 전무합니다. 강백호 환자가 다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다정하다, 사랑하지 않지만. 강백호는 양호열을 사랑한다, 다정하지 않더라도. 그러므로 양호열과 강백호는 연애하지 않는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양호열은 깨달았다. ‘나 백호에게 너무 다정한 거 아닌가.’ 계기는 간단했는데 바로 그의 가계부 반 이상이 백호를 위한 지출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화장품, 옷, 생필품, 파칭코 같은 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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