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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러분. 그간 건강하게 지내셨나요? 행운을 빌어주신 여러분의 덕택에 좋은 소식이 있어 초여름까지, 이번에는 조금 길게 연재처에서의 습작을 해제합니다. 이 글을 처음 쓴지도 벌써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습니다. 갈 수 없었던 시간 동안 그 도시에 낭만과 기대를 덧입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만들었다는 생각도 드네요. 2023년의 미국이 제게 친절했...
21 복도에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서로를 눈짓했다. 밝고 경쾌한 소리였다. 의례적인 웃음도, 성미 고약한 농담에 숨죽여 킥킥대는 웃음도 아니었다. 전쟁 중의 의료원에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체로 드문 소리였지. 문 너머에 있는 게 알렉산드라 렌슬리어임을 고려하면 말이다. 렌슬리어 대위가 웃질 않았단 뜻은 아니다. 그 불명예는 베...
20 제국을 떠나던 날, 프란츠는 배웅을 나왔다. 무도회가 끝난 새벽이었다. 아니, 끝나기 전이었는지도 모르고. 수도의 어떤 무도회들은 자정을 넘겨 이어지다, 떠오르는 해와 함께 겨우 끝을 맺는다 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놀고 마시는 것 뿐인 귀족들. 그들은 무대를 옮겨가며 밤새 쾌락에 탐닉했고, 그러다 남편도 아내도 아닌 이와 함께 아침을 맞고는… 뻔...
19 “대체 뭘 기다리는 겁니까?” 쾅, 탁자가 세게 내리쳐진다. 전보와 서류, 수북한 재떨이가 충격으로 덜컹댔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서서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폭발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보면, 아무래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합동참모의장, 외제니 크레이븐은 형형한 백발의 거목이다. 바짝 올라간 눈은 불처럼 번뜩이고,...
18 총성의 날로부터, 알렉산드라 렌슬리어 대위는 꼬박 닷새를 잠들어 있었다. 닷새. 닫힌 문 너머로 국가의 명운이 걸린 거래가 세 번은 오갈 수 있는 시간이다. 오백년 역사의 제국에게도 그렇거니와, 백년도 살지 못할 포로의 명운은 오죽하겠는가. 말 한 마디, 손짓 하나로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닷새였다. 리하르트 아드레이 코르베닉으로 말할 것 같으면…...
17 재와 먼지. 나무가 아닌 무언가가 타는 냄새. 폐허. 알렉산드라 ‘사샤’ 렌슬리어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모로 보나 불쑥 튀어나올 법한 대화 주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샤에겐 그런 취미가 있었다. 느닷없이 상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던지는 취미 말이다. 그래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어느 봄날, 사샤 렌슬리어는 지나가듯 고백했다. “그러고보니 그게 ...
16 이 오래된 공연의 막간에 들어서기 전에, 당신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막이 내리고 나면, 너머는 빛이다. 이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의심해도 이해한다. 사샤도 의심해보지 않은 것 아니니까. 불운이라는 게, 닥쳐오는 순간엔 깜깜해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는 법이라서… 그대로 뭣도 없이 끝장일 것 같지. 당신이 겪어보지 않았길 바라지만, 어떤 ...
15 공식 문건에는 남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신대륙에서 시민권리헌장이 선포된 날. 장장 반년에 걸친 넌더리나는 논쟁도 드디어 끝이 나고, 이제 신대륙 의원들에게 남은 과제는 단 하나였다. 저 어마어마하게 긴 양피지 가장 아래에 멋들어진 서명을 남기는 일. 문제의 문서에 대한 의견은 참석한 의원들의 숫자만큼 다양했지만, 모두가 입모아 동의할 ...
14 아침 열한시 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는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협상이 진행되는 일주일 내내 하늘은 찌푸린 듯 흐렸고, 그렇지 않은 날엔 돌연 비를 뿌리기 일쑤였다. 그렇잖아도 업무 스트레스로 골머리를 앓는 대표들과 군인들에겐 안타까울 소식이었다. 해라도 좀 나면 사람의 마음이 풀리게 마련이거늘, 쉬는 시간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중립국의 우...
13 대륙력 502년 열두번째 달 보름, 오후 한시 사십분경. 힐슈타트 북동부 제 14구 평화의 광장. 총성이 일곱 번 울렸다. 수사관들이 피로 젖은 바닥을 씻어내는 동안, 광장에서는 일곱 개의 탄피가 발견되었다. 사상자는 넷. 사망 둘, 경상 하나, 중상 하나. 부상자들은 즉시 중립국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으며, 현장 응급처치를 담당한 독립군 군의관, 카르...
12 시인들은 종말을 불타는 마차에 비유한다. 용암길을 덜컹이며 달리는 화염의 바퀴, 새까맣게 탄 난간, 검은 옷을 입은 마부. 오래 전부터 시인들이 동의한 비유였다. 석판에 새긴 고대 서사시부터, 조간신문 귀퉁이의 별볼일없는 시문까지. 화가들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시대는 장엄하고 음울한 예술을 낳는다. 덕택에, 제국 근대미술관을 산책하는 자들은 멸망의 묵...
11 “우산을 챙기셔야겠습니다.” 모자를 쓰던 손이 멈추었다. 챙 아래, 잿빛 눈이 거울을 본다. 어깨 뒤엔 익숙한 남자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비가 내린다던가?” “눈일 수도 있겠군요.” 거울 속의 유서프 베디비어가 대답한다. 알렉산드라 렌슬리어 대위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하늘은 몰려오는 먹구름으로 흐리다. “우산을 들기엔 내 손이 바쁘군. 외...
10 사샤와 프란츠. 한때, 카르파티아 종합대학의 모두가 그 이름을 알았다. 암모니아 흡입제를 챙겨다니는 학장부터, 갓 입학해 넓은 교정에서 길을 잃은 새내기까지 모두가. 그건 두 이름이 아니라 하나였다. ‘사샤와 프란츠.’ 이제는 이전의 생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어느 가을. 귀부인의 살롱에 출석한 프란츠 하이델베르크가 진짜 적수를 만났다는 소문은 불붙은 듯...
9 중립국, 힐슈타트. 국토의 절반이 험준한 산맥으로 이루어진 이념의 완충지대. 누구의 적도 아니지만, 누구의 편도 아닌 곳. 수백년간 어떤 전쟁에도 개입하지 않는 영세중립을 표방해온 이곳은, 일견 역설적이게도 첨단무기공학의 산실이다. 신도 왕관도 섬기지 아니하며, 오로지 자본에 충성하는 은행가들의 나라. 신구대륙을 막론하고, 가장 강력한 가문들의 재산과 ...
8 중립국으로의 항해엔 정확히 이 주가 소요된다. 알렉산드라 렌슬리어가 운명과의 관계를 재점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좀 어떠십니까?” 눈을 홉뜬 사샤가 위를 노려보았다. 무거운 갑주 대신, 독립군 장교의 제복을 갖춰입은 유서프 베디비어는 평온과 위엄 그 자체였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한 옷매무새,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카락. 코 아래를 가린 마스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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