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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프란츠 하이델베르크는 무도회장 한가운데서 춤추는 한 쌍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아쉬운가?” 젊은 변호사가 고개를 돌렸다. 인파가 갈라지는 바다처럼 물러나 길을 만들고, 곧 예복을 입은 아름다운 소년이 그의 앞에 섰다. 프란츠는 카르파티아의 왕세자가 탄생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 때의 프란츠는 고작 다섯살난 어린아이에 불과하였으나, 희미...
거리마다 등불이 환히 밝은 초겨울, 저녁. 수도의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다. 붙잡고 흔들면 찰흙건물 위로 흰 가루가 흩날리는 유리공처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흘러간 시대의 환상처럼 나부끼는… 그 해의 첫 눈이었다. 대로마다 제복을 입은 위병대들은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기에 여념이 없고, 낡은 외투나마 여러겹 껴입은 아이들은 옹기종기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소문은 중립국에서 시작되었다. 글쎄, 들었는가? ‘그 금고’가 열렸다는군. 침범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오로지 지키는 곳. 중립국 힐슈타트의 은행에는 수만개의 금고, 수만개의 사연이 보관되어 있다. 당연히 미심쩍고 괴이쩍은 소문이 얽힌 금고들도 한둘이 아니었으므로, ‘그 금고’라고 불리울 만한 대상도 수십년 간격으로 갈아치워지곤 했다. 5세기 말 현재...
프란츠 하이델베르크가 말했다. “여긴… 많이 변했군.” 답지 않게 감상어린 어투였다. 놀라기라도 한 걸까, 오늘의 주인공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리듯 웃는 입술이 붉고.... 프란츠가 이마를 찡그렸다. 눈이 부셨다. “그래? 에스터하지 남작부인께서 내 입학 이후로 후원을 몇 배로 늘리셨다더라고. 덕택에 교정이 제법 변하긴 했을 거야.” “많은 게 이해되는 대...
왕세자는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흔들리는 뱃머리에 서서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아는가? 잠잠할 틈 없는 밤바다에서 목적지 없는 항해를 지속하는 기분. 성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키는 것이 먼저일지, 혹은 안전장치 없이 휘청이는 당신이 추락하는 것이 먼저일지 가늠하는 기분을. 열넷, 카시우스 기디언 라이프니츠는 짧은 평생을 침몰해가는 배 위에서 살...
마차를 타는 것을 좋아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그리트가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캐시까지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그 때도 정말이지 드물었다. 메그의 아버지에겐 국정을 수행하고, 사냥을 나가고, 귀족들과 시가를 태우고, 유명한 여배우가 등장한다는 극장에 드나들 시간은 있었지만, 딸과 마주 앉아 함께 식사를 할 여유 따위...
카르파티아 종합대학의 첨탑은 스카리프에서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 수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은 어느 지방보다도 풍부한 사회적 혜택과 문화적 특권을 누렸고, 그를 (재수없게도) 당연히 여겼다. 허나 그들에게도 특히 자랑스러운 기념비는 있는 법이다. 표준 경도 0도를 상징하는 유기적이고 튼튼한 첨탑은 적국과 우방을 가리지 않고 대륙의 모...
상서로운 소나기가 땅을 가뿐히 적시고 지나간 493년, 늦가을. 카르파티아의 수도 스카리프는 드물게 아름다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색 태양이 떠오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고, 서풍은 새벽안개를 쫓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수도 중앙광장은 벌써부터 분수대의 물소리, 창문으로 식기 부딪히는 소리, 하루 장사의 시작을 준비하는 상인들의 한숨소리로 부...
비가 내렸다. 사샤가 차양 밖으로 손을 뻗어보았다. 튀어오르는 빗방울이 경쾌하고 차갑다. 좀 춥긴 하지만, 이 정도면 역까지는 뛰어가도 되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쏴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이 흥건하게 젖는다. 지나가는 소나기겠지만… 어둡게 물들어버린 보도블럭을 보며, 사샤가 한숨을 겨우 참았다. 이대로 나갔다간 물에 젖은 새앙쥐 꼴이 나게...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자주 발견되는, 수도의 고급 문구점 직인이 찍힌 두꺼운 종이. 두어번 접은 흔적이 있다. 잉크가 떨어져가는 만년필로 작성했는지, 이따금 획이 끊긴 부분이 보인다. 다급한 필체로.)나의, 친애하는 사샤.이걸 발견한 그대가 놀라주면 좋겠지만, 그건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겠지. 내가 어설프게 그대의 소매에 이걸 넣으려다 들통나지만 않았기를...
사샤는 천천히 깨어났다. 느리게 초점을 되찾는 풍경은 따뜻하고, 붉다. 더듬어보면 베개 대신 쿠션이 목을 받친 채고, 몸엔 무릎담요가 덮여 있다. 등 아래서 가죽이 삐걱대는 소리. 서재에서 깜빡 잠든 모양이다. 참, 새삼 젊음은 축복이다. 소파에 구겨진 휴지처럼 잠들고도 삭신이 쑤시지 않는다니. 프란츠 걘 아직 담이 결린다는 게 뭔지도 모르겠지? 사샤가 생...
수도 서부 리덴슈타이세 가(街) 10번지, 스타이번 의원저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바쁜 오전을 보내고 숨을 돌리던 사용인들의 휴식이 끝나는 소리였다. 그들이 약속한 듯 입구를 돌아보았다. “추워, 너무 추워!” 돌풍처럼 들어치는 바람과 함께, 외출했던 아가씨 일행이 의원저로 돌아왔다. “뮬러, 우리 초콜릿 한잔씩 준비해줘요. 내 건 보리주를 잔뜩 넣어서!” ...
사샤가 거무튀튀한 도자기를 후, 불어보았다. 햇볕도 들지 않는 이 골동품 가게 구석에 얼마나 들어앉아 있었는지, 두터운 먼지는 숨 한번 부는 정도로는 꿈쩍도 않는다. 덕분에 무늬는 모르겠지만… 춤추는 곰이나, 백조같은 게 그려져 있으면 아주 낭만적일 텐데. “경고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뒤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소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샤 렌슬리어가 생각했다. 여기 수도가 터가 좋나? 뭔 만나는 애들마다 이렇게 비범해? 리하르트 코르베닉은 잘 달렸다. 열한 살 치고 제법 잘 달린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대단히 잘 달렸다. 사샤가 내리기엔 좀 민망한 평가지만, 도저히 그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기량이었다. 이제보니 수도의 특산물은 신동인 모양이다. 지난 전쟁에서 에스칼로트의 기병대...
그 겨울, 소년은 달리고 있었다. 익숙한 손이 고삐를 당겼다. 잘 훈련된 말은 단순한 움직임만으로 쉬이 속도를 늦추었다. “착하지,” 속삭이면 말은 히힝대며 경쾌하게 대답한다. 소년이 갠 하늘처럼 짧게 웃었다. 초겨울 바람은 벌써부터 혹한을 예고하듯 차가웠으나, 말 위의 소년은 가을날 산책이라도 하듯 가벼운 차림이다. 사관학교의 문장이 달린 승마복은 질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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