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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목이 서동재라는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이래 서동재가 구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명 한때는 서동재 본인이 자의로 요란했기 때문이었지만 퍼드덕거리던 공작새의 깃털이 헝클어지고 찢겨나간 뒤에도 서동재는 수시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의 입을 타고는 했다. 대개는 사건사고였는데. 최근의 소재는 결이 조금 달라졌다고 시목은 생각한...
2023년 3월 포스타입 온라인 온리전 <쉿! 비밀의 맛집> 참여글공백 포함 약 76,000자이십대, 여행, 다른 직업 au 등의 가라가 가득한 설정이지만 그 어느 설정도 딱히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날 하늘을 가르고 빨강이 날았다. 푸른 하늘처럼 단정하고, 정갈하고, 평탄하던 광활 속에 날아든 붉은 색의 꽃잎 한 점. 첫날 얇게 잡히는 ...
마차가 도시의 경계를 짓는 성문을 나설 때 동재는 발을 걷어 밖을 내다보았다. 성문을 들고 나는 수많은 서도의 사람들은 어찌 모두 저마다 제 갈 길을 알고 있다는 듯 바삐 발을 움직이는지, 그러나 여기 덜컹대는 마차 안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온 곳도 갈 곳도 모른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는 해가 져 있지만 별을 볼 수 없다. 동재는 평소 진저리치...
미쳤다는 생각은 몇 번을 했을까. 열두 번? 아니 백이십 번도 넘었을 것이다. 관례를 갖추기는커녕 시종장을 포함한 집안의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도둑이 남의 집 담이라도 넘는 것처럼 움직였다. 시비들의 눈을 피해 신랑 처소에 딸린 후원 뒤의 후미진 문으로 나서 신왕과 함께 마차에 몸을 실으면서 마음 한켠으로라도 이것이 어느 만큼의 미친 짓인지에 대...
간밤, 동재가 월견랑의 집에 들어온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동틀 무렵까지도 멈춤 없이 쏟아지던 빗발은 조식을 들기 시작할 즈음 조금씩 긋기 시작하더니 식사를 마치고 동재가 방을 나설 때엔 땅과 수목만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비가 그친 공기는 산뜻하고 바람 없는 아침의 안가가 모처럼 포근하다. 이런 날엔 병약한 신부라도 잠시간 뜰을 거닐거나 소일거리를...
“아가씨께서는 시문을 좋아하시는 것이냐?” “특별히 골라 읽으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만, 근자에는 사서보다 시문을 자주 읽으시던 것 같습니다.” 동재가 월견랑의 집에 든 지 나흘째의 아침이다. 그간의 저녁 다례 동안 두 번의 필담이 있었고 그녀의 몸종인 시목과 이렇게 한담을 나누는 것은 오늘로 세 번째. 이제는 말하자면 매일의 일과처럼 만들어가고 있...
신왕 서동재가 첫 정실부인을 맞기 위해 서주의 황상공부 별가에 든 지 이틀째의 아침. 지난 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의 식사 자리에도 신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처음 시종장에게 들은 바 그대로 아마도 그녀는 동재가 이 집에 머무는 기간 내내 자신의 방에서 식사를 마칠 모양이다. 동재는 오히려 덕분에 더 편해진 것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이유야 어쨌든 끼니때마...
‘마녀’가 태어나던 날에는 초여름 밤에 눈이 내렸다. 서역 사막의 불그스름한 먼지를 품은 눈은 그 빛깔만으로 이미 불길했고 때와 자리를 잘못 찾은 눈발은 그해 황가의 힘이 닿는 땅 구석구석 돌이키기 힘든 냉해를 남겼다. 마녀가 태어난 지 백일 되던 무렵의 수확기에는 집집마다 갱죽을 쑤었다. 누런 눈이 내리던 날 태어나 누런 메마름을 상흔처럼 일대에 남긴 아...
대한민국 신성장동력 컨텐츠 산업의 중요한 한 축을 책임질 존재라는 유망 신진 영화음악 작곡자의 스튜디오가 애송이들의 술판으로나 사용되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이 나라 클래식 음악계의 미래를 보여줄 주요 지표 중 하나로 꼽히는 명문 음악대학 오케스트라의 콘서트마스터라는 인간이 그 스튜디오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다. 매우 통탄할 일이다. 정확히 그 콘서트마스...
늦었다. 십 분 전에 알람이 꺼진 시계를 확인하자마자 누운 자리에서 허리 힘만으로 용수철처럼 일어난 시목은 샤워와 면도를 한꺼번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해치우고는 지하철 계단을 다닥이며 내려갔다. 지각 위기 앞에선 한걸음에 계단 세 칸씩을 넉넉하게 커버하는 너그러운 보폭으로 날아다니는 어디의 누가 ‘오종종한 귀여운 걸음걸이로 잘도 뽈뽈뽈 돌아다닌’다고 표...
“사기꾼이었던 거죠. 아, 내가 진짜. 돈도 돈이고 헛짓 하느라 쓴 시간 하며. 너무 아깝고 화나고 속상한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두 번째로 이유안을 만나고서야 서동재는 자신이 유안과의 첫 만남과 그녀 자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유안은 말할 때의 목소리가 경쾌하고 웃음소리가 듣기 좋은 사람이었다. 첫 인사지만...
보라색에 환장한다는 교수의 취향에 맞춰 오케스트라 전체가 통째로 드레스코드를 보라로 맞추고 수업 시작 전에는 해피벌스데이를 깜짝 연주하면서 누군가 한 명이 보라색 맞춤 케이크를 들고 등장하는 짓. 눈칫밥 이십 년의 서동재 머리에서 나온 이벤트였고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까탈스럽고 사람 가리고 소셜라이징 즐기지 않는다던 지휘자 임 교수가 오케 전원을 아우르...
스무 해를 넘게 살면서 황시목은 스스로의 인생이 당장 치명적인 고난이나 역경에 처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금 더 너그럽게 말하자면 심각한 경색이나 거슬림 없이 살아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평생 그 트랙 위에서 신동, 천재, 금관의 미래, 최고 엘리트 등등의 찬사를 받으면서 현재까지의 성취를 구가해 왔다. ...
화면 한쪽에 밀어둔 카카오톡 채팅목록 창에서 알림을 꺼놓은 단톡방 중 하나의 빨간색 안 읽은 메시지 숫자가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게 보였다. 잠깐 주저하다가 클릭. 새로 뜨는 창 안에 사진이 한 다발 묶여 올라와 있다. 오늘은 드레스인가 보다. 결혼식을 앞두고 식장부터 사진, 메이크업이니 드레스 등등의 준비 과정 거의 대부분을 가장 친한 친구들과 시시콜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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