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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의 칼을 녹여서 목걸이로 만들었다니. 황당했다. 나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목걸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은색 목걸이가 보석처럼 빛을 발하며 반짝이고 있었다. 전설처럼 여겨지는 물건을 정말 그렇게 쉽게 없앴을까? 카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저 목걸이가 베렌의 칼인지 아닌지 알아낼 증거를 찾아야 하는데. 가만히 목걸이를 보다가 그것에 어떤 ...
빈 찻잔에 분홍빛 차가 따라졌다. “잠시만요. 차에 꽃잎을 띄워 드릴게요.” 저택에서 가장 어린 하녀 릴리가 차 위에 하얀색 꽃을 올려주었다. 나는 릴리가 놓아준 찻잔을 물끄러미 보다가 싱긋 웃었다. “고마워, 릴리.” “그럼 맛있게 드세요.” 릴리가 가자 정원의 한가운데 위치한 테라스에는 새소리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가득 찼다. 매일 아침 엘리엇...
도착한 장소는 이곳, 에스파르트 왕국의 국왕인 란돌프 2세가 사용하는 개인 응접실이었다. 여러 겹의 풍성한 커튼과 섬세한 태피스트리, 그리고 묵직한 색감의 가구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주인을 소개하기라도 하듯 통일된 느낌으로 꾸며진 공간은 그가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안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이 내가...
이른 아침인데도 벌써 햇빛이 따가웠다. 천막 아래로 들어가자 기분 좋은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하나로 묶으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따뜻한 봄 날씨에 이끌려 나왔기 때문인지 시장은 아주 활기찼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신선한 꽃향기가 이곳의 계절을 실감하게 했다. “다 되었습니다.” 옆에서 들린 앳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직 건물에 들어가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이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보안장치를 푸는 소리 너머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지나자 1층의 테이블에 모여있던 조직원들이 아는 체를 했다. “일라이가 일찍 출근하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잘생긴 얼굴이 말이 아니군. 악몽이 ...
내 하루는 항상 같았다. 어둔 밤.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면 틈새로부터 새어 나오는 가늘고 긴 빛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언제나 밤이었다. 혼자였고, 외로웠으며.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둠 속에서 무작정 손을 뻗어 더듬다가 손에 무언가 잡히면, 그것이 유일한 구원인 마냥 꼭 붙잡는 것이다. 너는 꼭 그런...
예지는 비장한 얼굴로 재경을 쳐다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재경이 손가락으로 신호를 주는 순간, 예지와 재경은 동시에 뛰어들어 감자를 붙잡았다. 감자가 신나서 날뛰는 걸 억지로 붙잡으며 둘은 수건으로 감자를 닦았다. “아, 진짜! 이제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아직도 자기가 작은 줄 아나 봐!” 예지가 낑낑대면서 감자의 발을 닦아주자 감자는 마냥 좋다고 혀...
“이제 올해도 끝이네.” “그러게 말이야. 벌써 크리스마스이브라니.” 손님이 없어 한적한 시간, 카페 정리를 하면서 규리와 선욱이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항상 앉는 창가 자리에 앉아 따사로운 겨울 오후의 햇볕을 쐬며 나지막한 말소리를 들으니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잠을 깨려고 몇 번 눈을 비비던 예지는 결국 노트를 덮고 턱을 괴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파랗고 검은 잉크를 잔뜩 뿌려놓은 듯 짙은 밤하늘과 그 빛깔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는 바다. 그 위에 부서진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이 가득 수놓아져 있었다. 이곳은 밤이었지만, 어떤 빛도 더 필요하지 않을 만큼 환히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고향인 꿈의 바다에서 요정들은 더는 본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 빛무리 사이로 푸른 빛을 뽐내는 인어들이 바닷속으로 뛰어들...
예지는 요정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듯 찬찬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폰토스, 아이테르, 므네메, 에레보스. 이제 유선형을 완전히 잡을 기회가 왔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 바람이 불자 폰토스의 긴 하늘색 머리가 흔들렸다. 폰토스는 바람을 맞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우린 네가 도움을 원할 때면 언제나 널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어. 므네메도 고개를...
꿈 일을 할 때 명심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꿈에서 아무에게도 속지 않고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꿈을 이용하지 못하면 꿈을 영원히 두려워하고 도망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영리하게 꿈을 이용해서 원하는 걸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 예전에 재경이 전해준 말을 떠올리며 점원에게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
“예지야, 저녁 먹자.” “네, 잠깐만요.” 방에서 나오자 엄마가 배달시킨 치킨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아빠 앞자리에 앉아 치킨을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우리 예지, 이번에는 무슨 상 받는다고 했었지?” “어머, 그걸 잊으면 어떡해? 전국 청소년 영상제 대상이라고 했잖아.” “아, 맞다 맞다. 그걸 잊어버렸네. 진짜 대단해, 우리 딸. 선물로 뭐 ...
유리문 너머로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예지는 카페 1층 창가 자리에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빗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구경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휴업 중인 카페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고요하고 적막했다. 므네메를 데리러 나간 점장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1층에 앉아있긴 했지만, 다들 별...
예지는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많은 요정이 자기를 지켜보고 기다렸던 이유.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 이유를 므네메가 말해주었다. “우리도 예지 양이 나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건 예지 양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거든요. 우리의 일이기도 했어요. 우리 요정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오랜 기다림은 헛된 일이 아니었어요. ...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래가 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빠져들고 있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그 생생한 감촉을 느끼며 예지는 확신했다. 아, 이건 꿈이구나. 가끔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곳이 꿈이라는 걸 안다고 해서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예지는 입속으로 들어오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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