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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은 짧고 사무적이었다. 마지막 선고에 그는 하얀 바닥에 꿇어앉은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담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을 나누어 담은 시선이 그를 향했다. 하얀 가운의 의사는 말을 마치자 잠시 고개를 숙여 조의를 표했고, 짧은 침묵 끝에 발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드러운 손길이 그를 잡아 부축하려고 했다. 제 ...
"별 것도 아니네." 눈을 흘기며 던지는 가벼운 힐난. 그건 검은 쇳가루가 바람에 실려 피어오르는 강둑, 은발의 사내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온 오키타 소고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언뜻 듣기에는 어느 맥락이든 끼어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애매한 말의 참뜻을, 아마도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알아챈 곧은 자세의 남자는 바로 눈을 치떴다. "야....
히지오키 어떻게 저 어린애랑 붙어먹을 생각을 하냐고 1번대한테 경멸당하는 히지랑 은근히 과보호 즐기는 소고 보고싶다. "어이 소고-" 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보고드릴 게 있는데요 부장님?" 하고 끼어드는 1번대 최고참과 다른 대원들한테 둘러싸여서 복도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대장님. 히지카타가 애쓰는 모습 보는 게 좋아서 기특한 부대원들의 얕은 속셈에 당해주는 ...
곤도 이사오, 은퇴. 히지카타 토시로, 좌천. 오키타 소고, 할복. 첫만남으로부터 근 십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자면, 그동안 오키타가 그에게 가장 자주 건넨 말은 분명했다. 죽어, 히지카타. 그럴 때마다 그가 오키타에게 맞받아친 말도 선명했다. 할복해라, 임마. 그러나 히지카타 토시로는 단 한 번도, 오키타 소고가 스스로의 복부를 갈라 죽을 것이라고는 정...
모든 일이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오르자면, 아무래도 익숙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햇빛이 밝을 때는 귀가 먹먹해지도록 요란하고, 네온사인이 휘황할 때는 고성과 욕설이 난무하는 에도 한복판의 이 거리도 이 시간만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아무리 늦게 잠드는 이라도 잠들었으머 가장 일찍 깨는 이마저 아직 몸을 일으키기 전이다. 새벽 네 시 반, 카부키쵸답지 않은 ...
붉은 눈이 치켜뜨이고,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솟아올라 갑판을 덮은 뜨거운 먼지구름을, 소년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분진이 흩날리고 불꽃이 툭툭 터지며 크고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다.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저 안에 무언가 있다고. "아!" 높고 쾌활한 목소리가 터짐과 동시에 뿌연 먼지구덩이 바깥으로 ...
부상으로 다친 건 아무렇지 않아하면서도 병으로 아픈 건 답지 않게 철저히 대응하는 소고. 사실 몸은 튼튼한 편인데도 미츠바의 지병을 너무나도 오래 봐와서 저도 모르게 마음에 새겨진 반사적인 공포 비슷한 것. 한 해에 두 번 정도, 환절기가 되면 꼭 가벼운 열병을 앓고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꼭 히지카타를 불러대는 소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옆방에서 심상치 않은 ...
강함은 상대적이며, 순간적이고, 상황적인 것이다. A는 B보다 강하다, 라는 것은 대체로 공허한 문장이다. 가령 우주의 무수한 공간과 시간에서 그들의 모든 가능한 싸움이 일어났을 때, 결과를 세어보니 B가 죽은 것이 A가 죽은 것보다 더 많더라, 하는 정도. 그게 눈앞의 싸움 한 판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당장 한 번이라도 손발이 헛나가면 죽...
*죽을 수 없는 방 안에서 오키타가 히지카타를 아주 심하게 괴롭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결제선 아래에는 적나라한 고어, 유혈, 고문 묘사가 실려 있습니다. 열람 전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상한 곳이었다. "...어이, 소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는데요, 히지카타 씨." 이 자식과 함께. "이번에는 제가 아니에요." "믿을 만한...
후회해요? 아니. 그럼 됐네. 나도 안 해요. "부장님." "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 철판을 긁는 듯한 음성에 제복을 입은 남자가 흠칫 놀랐다가, 도로 자세를 가다듬었다.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이 야마자키 사가루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부장님." "나가라는 소리 안 들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일입니다." 간이침대에 걸터앉은 부장은...
행복을 잃은 소년에게 EP 3. 갈림길에서 카츠라 코타로는 언제나 머리가 아팠다. 그러니 간헐적으로 치미는 두통을 억누르려 이를 악무는 일은 오래 전부터 예삿일이었다. 반란은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일이며 지도자란 원체 쉴 틈이 없는 역할이다. 더욱이 사카모토 타츠마가 부상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나 보급까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는. 최대한 많은 것에 ...
외부에서는 흔히 진선조의 두뇌라고 불리는 히지카타 토시로였으나, 종이더미에 파묻혀 죽겠다고 중얼거리는 남자에게 묻는다면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히지카타가 서류 처리며 갖은 잔업을 맡은 유일한 이유는 그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에. 저편의 고릴라도, 반대편의 사디스트도 머리 굴리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아니, 소질이 없는 것에서 그치...
행복을 잃은 소년에게 EP 2. 그늘에서 피는 꽃 머리카락부터 걸치고 있는 웃옷까지 온통 하얀 청년이 천막의 발을 젖히고 나왔다. 새하얗다기에는 빛이 바랜, 하얀 회색에 가까운 빛깔. 그가 입구를 통과하느라 낮췄던 허리를 펴자, 남자의 덩치가 꽤나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흑발을 올려 묶은 청년의 눈대중으로는, 아마도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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