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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갈비뼈가 부러져서 폐를 파고 들었다고 했다. 예후가 그렇게 좋지 않다고. 하지만 세진의 나이가 어리니 지켜보자고. 그래도 수술은 잘 끝났다는 담당의사 말에 가까스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사람처럼 숨을 내쉬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건물 옥상에 올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았는데 필터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01 익숙한 아파트 단지. 자동차의 시동도 제대로 끄지 못하고 내렸다. 눈이 아프게 돌아가고 있는 빨간 사이렌과 몰려있는 사람들의 소리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알 수가 없었다. 노란 폴리스라인을 넘어가려는데 경찰이 들어가시면 안된다는 개소리를 해댔다. 허리춤에서 형사 뱃지를 보여주니 그제서야 죄송하다는 얼굴로 테이프를 들어줬다. 귀에서 벌이 ...
그러니까 이건 모두 박세진 탓이었다. "쌤!" "뭐냐." 피곤한 아침 댓바람부터 교무실로 찾아와 얼굴 앞에 들이대는 종이가방에 표정을 굳혔다. 가방을 살짝 흔들어보이는 세진의 얼굴엔 장난끼가 잔뜩 묻어있었다. 종이가방을 가만히 노려만 보고 있으니 얼른 받으라는 듯 세진이 턱짓을 했다. 받아든 가방이 꽤 묵직했다. "뭔데 이게?" "술." 세진의 큰 목소리에...
“기획안 이따위로 써올꺼야?” 긴 회의 테이블 상석에 앉은 국장 선배가 언성을 높였다. 꼴랑 한 살 위지만, 엄격한 기수제인 교내 신문사에서 국장을 이기는 사람은 없었다. 딸깍거리던 볼펜을 얌전히 손에 쥐고 기획안 구석에 의미 없는 육면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기획 회의에서 사진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고작 해봤자 탑사진을 뭐로 할지 정도...
“지르텍 하나… 아니, 세 통 주세요.” 아침저녁으로 눈알이 가렵고 재채기로 정신이 혹 빠지기 시작했다. 훌쩍임을 참아보려고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아보았지만 맨살에 거친 면이 닿은 코만 벌겋게 부을 뿐이었다.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봄만 되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 덕분에 단 하루도 멀쩡한 모습인 적이 없었기 때문일지...
내 연락 안받을거 같아서 왔어. 멀리서 송가경을 알아보지 못한건 이미 마셔버린 맥주 탓인지, 아니면 그 술도 모자라 집 앞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캔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정신이 팔려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을때는 이미 송가경과 눈이 마주친 후였고, 못 본척 돌아서기엔 너무 가까웠다. 더럽게 눈치 없는 인간, 이라는 원...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 앞이 뿌옇게 보였다. 눈만 떴을 뿐인데 벌써 무거운 머리의 무게가 느껴지고 팔다리가 자꾸만 침대 매트리스 속으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좋은 잠이 쌓인다더니 역시나 허위 광고였다. 오늘 하루도 길겠구나 싶은 생각에 안그래도 무거운 머리가 더 무거워지 기분이었다. 때마침 울리는 핸드폰 알림 소리에 손을 뻗어 협탁...
지이잉- 벌써 세번째 같은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는 답하지 않는게 습관 아닌 습관이었다. 유니콘 이사 직책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공공재가 되어버린 번호라 일일이 답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끊기나 싶었던 핸드폰이 다시 울리고 나서야 걸려오는 번호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끈질기게 통화음이 다 끊어질때까지 걸어오는 상...
째깍째깍. 거실에 걸린 시계 초침의 움직임이 강지구의 마음을 그 박자에 따라 갉아먹고 있었다. 새벽 2시 48분. 시간을 벌써 여덟번째 확인했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집안의 진공 때문에 귀가 아팠다. 세진이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 알고 있었다. 내 모든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데, 어떻게 사랑했는데. 늦어지는 귀가 ...
아무 사이 아닌데 이렇게 달려오면 어떡해? 너랑 상관없는 일이어야지. 헤어졌다, 송가경이랑. 우린, 사귀자는 말없이 시작했던 것처럼 헤어지자는 말없이 끝났다. 그래서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3년이나 만났는데 정리할게 없다는 것도 이별의 아픔을 가중시켰다. 지워버릴 같이 찍은 사진도, 찢어버릴 달콤한 편지도, 갖다버릴 기념일 선물 하나 있지 않았다. 같이 ...
어디니 어쩐지 오늘은 술을 더 마시고 싶지 않더라니. 쓸데없는 촉만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선배의 문자 속 어디니는 사실 지금 어디있는지를 묻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디 있건 누구와 있건 상관없고, 곧 도착할 문자 속 장소로 오라는 뜻이었으니까.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크게 한모금 들이마시고 그것보다 좀 더 길게 숨을 뱉어냈다. 선배의 다음...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의 수정본입니다. (Inspired by 콜드문샘 영상)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면 여지도 주지 말자는 다짐은 사실 강지구에게 통하지 않았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언제든 자신에게 달려와주는 모습을 보며 언제까지고 옆에 두고 싶다는 욕심을 누르느라 송가경은 담배가 늘었다. 늘 회색빛 삶이었다. 어릴땐 잘나신 아버지의 사업 성공으로 ...
...5, 4, 3, 2, 1. 속으로 마지막 1을 세자마자 지구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진의 눈이 빠르게 지구를 훑었다. 매번 검정색, 남색, 아니면 아예 흰색 셔츠만 입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로 베이지색 셔츠를 입었을까. 저런 밋밋한 색도 잘 어울리네, 예쁘다. 세진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꼬리가 휘어졌다. 지구는 교탁에 출...
"가만히 있지?" "아 왜애, 화났어요?" 눈치는 술이랑 같이 말아서 마셨니, 라고 묻고 싶은 걸 목구멍 저 깊이 꾹꾹 눌렀다. 아니 동창회를 왜 나가는거지? 나가봤자 어차피 술만 마시다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지는게 동창회 아닌가. 지구는 솟구치려는 원망 섞인 질문들을 삼키느라 어금니를 꽉 물고 미간을 찌푸렸다. 화났냐고? 화까진 아닌거 같은데, 아니...
"세진아, 그만 내려오자. 응?" 너의 눈이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차오른 눈물로 반짝였다. 천천히 들어올리는 손 끝이 떨렸다. 얼른 내 손 잡아. 그만 내려와 박세진. "속았지?" 뭘 속아, 아니야 박세진.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내 한심한 생각들이 다 끝나기도 전에 너의 몸이 뒤로 기운다. 잡아야하는데, 멀어지는 너의 손을 잡아야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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