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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똑똑] 입으로 만든 노크 소리에 학연의 고개가 올라갔다. 장난꾸러기 소년같은 미소를 짓고 서있는 릭이 보였다. 기분이 좋다 못해 들떠 보이는 얼굴이 오늘따라 뺀질했다. [재미있게 놀았어?] [엄청나게.] [부럽네. 누구는 이 시간까지 엉덩이 한번 못 떼고 일만 했는데 말야.] [적당히 해. 몸 상하겠어.] 릭은 손에 들려있던 제과점 봉투를 흔들어 ...
2년 전에, 상혁은 학연이 근무하는 도서관에 자주 드나드는 대학생이었다. 학연이 직접 상혁의 회원카드를 만들어주었고 그 뒤에도 간간히 마주치면 눈인사 정도는 주고받았다. 하루는 상혁이 찾고있는 책이 안보인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제가 책 하나는 진짜 잘 찾거든요, 큰소리 친것이 민망하게 학연은 그날 상혁이 찾는 책을 찾지 못했다. 도서관은 별별 사람이 다 드...
-걔는 그래요. 자기가 다 큰줄 알아. 어린애 취급하지 말래놓고 어제는 무릎을 까져서 온거예요. 스물 넷이나 됐으면서, 친구들이랑 축구하다 넘어졌대. 이게 지금 내 애인인건지 사촌동생인지 헷갈린다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은 학연이 더 의지하는 쪽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중령님도 맨날 이렇게 까져서 오고 말예요. 내 팔자야.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
상혁은 집으로 돌아가 총이 든 가방을 침대 아래에 숨겨두었다. 학연을 비롯한 그쪽 세계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미쳤구나 싶었지만, 총을 선물한 것에는 욱의 진심이 담겨있음을 알았다. 정말 쏠 일은 없겠지만 그의 마음은 잘 받아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겨울이 코앞에 다가올 무렵에서야 학연은 정식으로 폐공장 병원에서 퇴원했다. 아마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9. 기차역에서 우리 집까지 들어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 탔다는 메세지를 엄마에게 보내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피곤하다. 몸도 욱신거리고 결리는데, 여러가지로 잠이 안왔다. 김실장과는 잘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혹시나 다시 연락이 온대도 이젠 정말 겁먹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다. 재환이 때문이다. 나를 항상 믿는다던 걔를 ...
19. 친해지고 싶다고는 했지만, 설마 하루종일 릭을 돌보게 될 줄이야. 어젯밤 학연을 졸라 두 사람의 저녁 식사에 낀 재환은 부족한 영어실력을 총동원해가며 릭의 서울구경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졸랐다. 어떻게든 학연이 릭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릭이 냉큼 그럼 학연이 바쁘니 내일부턴 재환과 놀겠다고 답한게 화근이었다. 저랑 둘이서요?...
17. 무서워요. 아저씨가 쫓아와요. 괜찮아. 넌 아주 빠르게 뛰고 있잖니. 잡힐 걱정 없어. …넘어졌어요. 무릎이 까졌어요… 아파요. 쫓아와요. 저를 쫓아와요. 무서워요 선생님... 무서워요… 자, 저기에 네 친구가 달려오네. 썬샤인, 그애가 널 찾아왔어. …맞아요. 그애가 저를 발견했어요. 손을 잡았니? 네. 같이 뛰고 있니? 네. 우린 함께 있어요. ...
15. 솔직히 말해서, 망했구나 싶었다. 처음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첫만남, 첫키스, 첫경험… 재환이 무엇보다 공들이는 순간들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는건 단 몇분, 아니 몇초 안에 결정되곤한다. 일단 잘생겨놨으니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걸 스스로도 잘 알고있지만, 그는 단지 그것만 믿는 한량은 아니었다. 반할수밖에 없도록, 끌릴수밖에 없도록 상황과 ...
12. 잠에서 깬 학연의 온 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있었다. 이건 악몽인가, 아닌가. 나는 아직 제정신인가, 아닌가. 초침 소리에 집중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부스럭거리는 낯선 소리였다. 다시 눈을 뜬 학연의 표정이 사나웠다. 침입자인가? 아니면 또 환청인가? 어느 쪽이든 죽여버려야지. 소지를 허가받은 엽총이 침...
10. 상혁에겐 개인 사격장이라는게 존재했다. 드넓은 평야, 허가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사유지. 학연이 상혁을 만나는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는 오직 그뿐이었다. 사격장이 있고, 만날땐 마음 놓고 클레이 사격을 즐길 수 있다는 것. 탕! 귀마개와 고글을 낀채로 학연은 산탄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휙 하고 날아오르는 원반형의 피전이 허공에서 산산...
7. “저, 그렇게 울보 아니에요. 아까는… 놀라셨죠.” 카페에 앉은 학연은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머쓱하게 말했다. “진짜 눈에 뭐가 들어갔던거 맞아요? 솔직하게 얘기해 보세요. 괜찮으니까.” “진짜에요. 깜빡일수록 점점 더 아파져서, 이걸 어째야하나 고민하다 돌아본 타이밍에 그쪽이랑 눈이 마주쳐서…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차학연이라고 합니다.” “이...
4. 어린애가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듣는다. 재환은 그애를 찾으러 사방을 두리번대지만 안개가 심해서 찾을 수가 없다. 어디있니, 소리쳐 부르고 찾다가, 겨우 저 멀리 쪼그려 앉은 여자애를 발견한다. 짧은 커트머리에 헐렁한 나시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애. 나이는 열살쯤 되었으려나. 이제 울지마. 재환이 그애의 어깨를 다독일때면, 그제야 울음을 그치고 재환을 올...
1. 어느 한낮, 벌거벗은 남녀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남자의 배를 단단히 끌어안은 여자는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정한 커플인가 싶겠지만, 그들은 어제 처음 만났고, 지난밤 처음 정사를 나누었다. 정말 환상적인 밤이었어, 이것은 여자의 소감이었고.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 이것은 남자의 속마음이었다. 사실 할거 다 끝낸 뒤라 살짝 귀찮아지고 있...
상혁은 수업이 끝나면 곧장 학연이 누워있는 폐공장을 찾아갔다. 학연은 동면하는 곰 수준으로 잠만 잤다. 그 옆에서 상혁은 공부를 했다. 문제를 풀다 지치면 세상 모르게 잠든 학연을 구경했다. 그러기를 몇주, 이제는 상혁의 얼굴이 눈에 익은 조직원들이 제법 아는체를 하기 시작했다. 전혀 조직원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한 눈에 봐도 조폭처럼 생겨먹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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