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솨아아-. 깨진 창문틈 사이로 나뭇잎이 저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쓸려들어왔다. 서늘한 바람과 함께 얼굴을 묻은 팔 안쪽으로 들이닥친 햇빛에 치열은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갑작스러운 빛을 받아들이느라 하얗게 번졌다. 치열은 흐린 눈을 부비며 창틀을 짚고 섰다. 천천히 밖을 내다보니 어제까지 쏟아지던 비는 그친 지 오래였고, 하늘은 한겨울이 맞는지 ...
노애설은 원체 느리고 무뎠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외에는 욕심이 없었다. 할머니, 돈, 졸업하자마자 적당한 어딘가에 취직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성적. 그거면 됐다. 또래 친구들이라면 으레 좋아한다는 연예인, 고가의 전자기기, 화장품 등을 좋아하거나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음은 물론 친구 관계에도 미련이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
※ 스카버스(scar-verse): 소울메이트가 다치면 상대방의 몸에도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의 상처와 흉터가 생기는 AU. 소울메이트가 죽으면 그로 인해 생긴 상처 및 흉터가 모두 사라진다. 윤지우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와 생긴 시기도 크기도 각기 다른 흉터들을 한가득 안고 살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정태주의 몸에도 같은 상처와 흉터가 즐비했다. 현장을...
“현아. 네가 옆에 있을 때 네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어.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데리러 갈게.” 너는 통하지 않는 무전기에 대고 내게 약속을 했다. 들을 수 없었어야 할 그 무전을 나는 들었다. 그리고 101동 건물에 들어서기 직전, 너는 나를 발견했다. 이미 생명이 꺼져버린 나를. 너는 다 터져버린 내 시신을 붙잡고 그럴 리가 없다며 울부짖었고, 그 앞...
“새봄아.” “어. 이현아.” 정이현은 윤새봄을 한결같이 ‘새봄아’ 하고 불렀고, 새봄은 그런 이현에게 늘 ‘이현아’ 하고 답했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새봄이 이현을 옥상 밑으로 떨어뜨리고, 이현이 새봄에게 충동적인 고백을 떨어뜨린 날의 바로 다음 날 점심시간, 누가 말을 꺼낸 것도 아니면서 새봄과 이현은 당연하게도 옥상으로 향했다. 이현은 새봄이 보고 ...
“금방 올게.” 금방은 개뿔. 정태주가 나를 또 버렸어. 다른 연인들 간에 있을 법한 한갓 실랑이 따위가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남들같이 일상적인 시간이나 가져보려고 마련한 자리에서 태주는 체육관에서 온 급한 연락에 입에 넣지도 않은 밥도 내팽개치고 체육관으로 뛰어갔다. 오늘은 그들의 암묵적인 1주년, 뭐 그런 날이었다. 지우와 태주는 언젠가부터 이렇다 ...
꿈을 꿨다. 또 같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너는 밝은 옷을 입었고, 가리고 다녀야 할 온몸의 흉터 따위도 가지지 않았으며, 잘 웃었다. 네 옆에는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네 핸드폰에는 하루도 끊이지 않고 연락이 쌓였다. 냉기보다 온기가, 겨울보다 여름이, 어둠보다 빛이, 밤보다 낮이 어울리는 아이였다. 어설픈 미소가 아닌 환하게 웃는 얼굴은 반짝...
목놓아 울지도 못하고 끅끅대는 소리가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벌써 늦은 새벽이었다. 네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유난히 뻑뻑한 눈을 지그시 감고 눈썹뼈 밑과 미간을 꾹꾹 눌렀다. 피곤했다. 나는 회장님을 대신하여 너를 지켜보는 눈이자, 누구도 널 쉽게 건드리지 못하도록 가장 근접한 뒷배가 되어 주어야 했다. 당시 나에게는 챙겨야 할 식구들이 많았고, 그중 나름...
※ <2019.1.22. ~ 2021.12.01.>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앞의 글을 먼저 읽고 오시거나, 두 글을 비교하면서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용서할 수 없는 나의 연인에게 : 13개의 편지, 13개의 답장 어둡고, 어딘가 익숙한 모습을 한 사무실. 더 이상 피가 말라붙을 일이 없는 손이 깨끗한 종이와 만년필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렸다....
모든 일을 끝마치고 사라지기 직전, 지우는 태주의 사무실 비품보관함에서 수많은 편지와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 몇 가지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2019.01.22. 담배를 피우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사는 게 팍팍할 때 편지를 써보라고 하더라. 그걸 보내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려 보라고. 그래서 난 너에게 써보려고...
잠시 세워둔 차 옆으로 경찰차가 지나갔다. 흰 바탕에 푸른색 띠를 두르고 머리 위에는 파랗고 빨간 등을 단 차. 경찰은 이 세계에서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집단이었다. 그런 집단에 지우가 발을 들인다고 했다.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여린 아이처럼만 보였던 그 애가. 꾹 다문 입 옆으로 그림자가 길게 생겼다가 금세 사라졌다. 요즘 생긴 습관이었다. 순간적으...
지이잉-. 낯선 기계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지우는 오늘 막 말단 조직원의 이름을 달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조직원이나 다름 없었지만 가슴팍에 문신을 새기는 건 마찬가지였다. 체육관을 나온 지는 꽤 되었지만 잠시라도 체육관에 발 붙이고 서있었고, 지우의 존재를 아는 건 무진을 제외하고는 태주밖에 없다는 이유로 무진은 태주에게 직접 문신을 새기라 명령...
태주는 아무에게도 아프다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제 밑의 수하들에게는 할 말이 못 되었고, 제가 모시는 대표님에게는 어리광을 부릴 처지가 안 되었다. 위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정작 제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간극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외로움을 만들어냈고, 외로움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아파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그 애였다. 배신자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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