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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영은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그런 건 다 거짓이라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산타클로스와 같은 것이라고. 거짓말의 대상은 다르지만 하수영에겐 딱히 다를 게 없었다. 이 세상엔 산타클로스 따위 없었고, 운명 따위도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수영은 인기가 많았다. 좋은 비율과 남녀 할 거 없이 좋아할 얼굴, 좋은 성격, 그리고 친화력까지. 많다 못 해 넘쳐...
어느덧 반갑기만 했던 봄과 가을이 지나고 남은 건 겨울 하나 뿐인 시기가 되었다. 그저 춥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겨울이 유독 더 싫게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내 곁에 너가 없어서겠지. 봄엔 손을 잡고 예쁘게 핀 꽃을 보러 갔고, 여름엔 더위를 피해 바다를 보러 갔고, 가을엔 여태 꺼내지 못 했던 예쁜 옷들을 꺼내 입고 놀러 다니며 사진 찍기 바빴는데. 겨울엔...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 삶이 내가 쓴 시나리오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부모도, 친구도, 학교도, 직장도, 그리고 미래마저도 내가 정한대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난 평생 불행할 일도, 불쌍하게 우는 일도, 화를 삼킬 일도 없을 텐데. 어릴 적부터 해 왔던 것이 망상이라는 건 깨달은 지 오래였다. 한 사람의 삶이 하나의 시나...
"언니 뭐 먹을래요?" 사람이 헤어지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 때문에 항상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이별에 대한 이유를 궁금해 한다. 보통 친구의 연애사를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왜 헤어진 것인지 알고 있지만 나의 경우, 나와 그 아이의 연애사에 대해 일절 이야기한 적이 없기에 주변 친구들의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
하수영이 날 따라다녔던 시간 3년, 내가 그 언니와 사귀었던 시간 2년, 그리고. 거센 비가 내리는 날의 카페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피곤에 찌들어 카페인에 의존하는 직장인들은 축 처지는 날을 따라 축 처져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만 두들기기 바빴고 카페에 모여 앉아 대화하기 좋아하는 십대의 어린 아이들은 집에 누워 휴대폰을 하기 바빴다. 바깥 날씨는 한 마디...
"그냥... 그럴 때가 있어요." "어떤 때요?" "그 아이가 그냥 걷기만 해도 귀엽고..." "그리고?" "때로는 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지어지고요." 이거 혹시 병인가요? 뭐, 심장병이라든가. 초점이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 하는 하수영과 달리 그 앞에 앉아 하수영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한 여인의 입가엔 미소가 사라질 생각이...
모든 게 내 뜻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빨리 가기만을 바랐던 시간은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흘러갔고 요 근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나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불행하게만 느껴졌던 삶을 조금이라도 더 행복과 가까워지게 하고 싶은 마음에 고했던 이별은 나를 행복에 더 가깝게 만들어 줄 거란 내 생각과 달리...
오늘은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은 하루였다. 일어날 시간에 맞춰 집안에 들어온 따사로운 햇빛이 오늘따라 아무런 감정 없이 눈부시기만 하였고, 늘상 먹던 아침이 새삼스레 더럽게 귀찮기만 했고, 또 뭐가 있더라. 그냥, 그냥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은, 내가 평소의 내가 아닌 것만 같은. 그러니까, 한 마디로 뭣같은 기분이었다는 거다. ...
"헤어지자." 최예림 특유의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사람의 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오로지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 들리던 집안에는 최예림의 목소리가 딱 한 번 울린 후로 다시금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감하게 티비를 바라보던 시선이 최예림에게로 향했다. 뒤에 다른 말이 따라올 법도 한데 최예림은 그 짧은 한 마디를...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첫사랑에 성공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으니까, 저런 이야기는 친구들과 첫사랑 이야기를 할 때나 장난스레 하는 말이니까, 혹여 그 말을 믿으면 내 첫사랑이 그대로 끝나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첫사랑이었다. 그 언니는 연애의 연 자도 모르는 나의 마음에 나도 모르게 들어왔고 첫사랑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나는...
뭣같다. 기분이 더럽다.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다. 이 기분이라면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둘을 아무도 모를 깊은 산 속으로 데려가 파인 구덩이에다 묻어도 모자랄 것 같았다. 내 정면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정진솔은 아무렇지 않게 크게 뜬 두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그 옆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여자 애는 지 잘못을 안다는 듯 고개를 들지도 못 하고 ...
하수영이, 나의 사랑이자 나의 하나 뿐인 언니가 나에게 알려준 어른들의 연애란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곳보단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함께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것보단 떨어져 걷는 것을 좋아하고, 아무 말 없이 연락이 되지 않아도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고, 가끔은 시간이 있어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어른들의 연애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아 온통...
서로의 앞에 앉아있는 나와 김지우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흐른다. 둘이 함께 있을 때면 어찌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한 시도 입을 가만 두지 않는 김지우 덕분에 우리 사이는 조용할 날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김지우마저도 입을 열지 않는다. 나지막히 옆 테이블에서 이어지는 대화가 귓가에 들어온다.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
연애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초반엔 모든 게 아름답고 모든 게 행복할지라도 끝은 불행일 것이라는 이야기.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부정을 하고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연애가 불행으로 끝나진 않는다는 말과 모든 연애엔 불행이 섞여있다는 말. 나에게 두 말 중 어떤 것이 더 맞는 것 같냐 묻는다면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창문을 통해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빛이 들어온다. 수업이 진행되는 고3의 교실은 나지막히 울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글을 읽는 선생님의 목소리, 필기를 하는 학생들의 펜 소리, 오늘 하루는 날씨가 좋다는 걸 알리는 새들의 울음소리. 이 고요한 분위기를 앞서 붙인 온갖 미사여구를 떼고 이야기 하자면, 낮잠 자기 딱 좋은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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