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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에 딸려 있는 유치원은 제대로 된 큰 유치원이라기보단, 부부 연구원들을 위한 보육원에 가깝다. 그 덕분에 규모는 작으면서도, 규모에 비해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더더욱 적은 편이었고. 그 사이에서 작은 유치원 의자에 앉아서 그림책을 보며 웃고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 1학년 정도로 보이는 그 아이는 혼자 있다. 유치원 방은 어떤 면에서는 다...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여동생은 별 문제 없이 잘 지내는 것 같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우리가 처음 대면하기로 결정된 오늘까지 문제 있다는 말은 없었으니까. 문제가 없다는 별첨의 연락이 없는 게 다행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알 수 없다. 나는 두꺼운 여동생 보고서를 읽으며 며칠간 골머리를 앓아야 했으니까. "두껍기도 해라. 그러길래 미리 보랬지." 그녀는 ...
내가 엄마의 노벨상 수상 불발을 아쉬워하는 사이, 윤리위원회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실상 이 자리는 연구 윤리위원회이기도 했지만, 나에게 더 캐낼만한 정보가 없는지 검증하는 자리기도 했으니 내가 이야기 할 것은 없다. 이 자리가 학술대회 자리였다면 나도 나서서 질문했겠지만, 그런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좀 짜증나네. 지들이 ...
엄마가 돌아가신 뒤, 일주일 뒤에 연구소에서 날 찾더니 보여준 영상과 엄마의 연구와 관련된 내용을 전해들었다. 영상엔 내 여동생이 뛰어놀고 있었다. 외동으로 살아온 사람은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형제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언니가 있었다면 언니와 치고박고 싸웠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
"크긴 더럽게 크네, 진짜." 그러니까, 요즘 누가 솜이불을 쓰겠어요. 나는 불평을 내뱉는 것 외엔 길이 없어요. 나는 이 이불의 주인을 떠올리며 이삿짐 상자 속에 꾹꾹 눌러 담고 있어요. 솜이불을 이렇게 취급하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딱히 집안일에 조예가 없는 나도 아는 사실이긴 하지. 그렇다고 달리 이삿짐을 옮겨줄 사람도 안 오고, 택배로 짐을 부쳐...
나는 연진의 표정을 보다가 머쓱해진 바람에 빠르게 수습하듯이 말을 이어간다. 설마 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더라도 차단해야지 싶기도 하고. "표정은 왜 그래. 그 즈음의 부모님은 원래 만능이잖아." 실제로도 그 즈음 부모님이란 초인이고, 감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연진은 그런 생각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감각을 조용...
죽은 사람은 위치를 바꿀 수 없어 낭만화 되곤 한다. 잔인한 말이지만, 정말로 그러할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자주, 빈번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어머니가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난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개를 젓는다는 게 좀 죄스러운 한국인의 정서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다...
크고 하얀 얼음이 안에서 굴러다니는 얼음 음료 전용 용기로 지현 씨는 한 모금 술을 들이마신다. 무중력 공간에서 얼음과 함께 음료를 마실 방법이 많지 않다보니, 부득이하게 술 또한 이런 방식으로 마시게 된다. "인류는 이제 효모와 오크통에 비견될만한 주조 실력을 가지게 되었군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주조의 역사를 모두 미생물과 무기질의 상호작용으로 ...
"그 실현성에 대해서는 이제 논의할 게 없다고 해도, 의문은 남아요." 지구와 우주에서 기부받은 생수들을 이용해서 우주 특정 위치에 물로만 구성된 행성을 만들겠다는 그 의지, 그럴 수 있다. 태양풍을 맞아 휩쓸려나가고, 방사선 때문에 분해되고, 뭐 그런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무튼 본인들은 가능하다고 여기니까 시작했겠지. 가능성을 신뢰한다면 이제 중요한 건 동...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만큼이나 아이러니한 말이 있을까. 집에 찾아오는 경우에는 보통 이런 말이었고, 요즘은 또 달라졌던가. 난 그래서 내 방의 문을 두드린 그 사람을 한참 보다가 조용히 돌려보냈다. 물론 한참의 기준이라 함은 나의 인내심의 영역에서 한참이었고, 실상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말씀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기다리던...
"오늘은 문지방도 밟지마." 어처구니가 없던 나는 커피를 들고 들어오던 채로 문지방에 발을 소심하게 스윽 마찰시킨다. 다행이야, 나의 소심한 복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서버 시간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핸드폰을 열심히 바라보는 애인은 조용하다. "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말인가 모르겠는데." "모르면 어때, 지구 출신 아니면 그런 말 하면 안된다고 하는...
개같은 아미노산 같으니. 좀 맛있으면 어디 덧나나? 단백질은 그런 놈들이다. 적당하게 지방이나 당처럼 쉽게 맛있을 수 없는 놈들. 단백질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가? 크기가 커서 그 맛을 느낄 수 없는 주제에, 분해가 되어서야 맛을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커다란 단백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수용체가 우리에겐 없다. 맛은 단백질이 부...
안녕하세요. 패턴입니다. 작심삼월도 어느덧 절반을 넘어서서, 한달 가량 밖에 남지 않았네요. 시작할 때에는 막상 막막했고, 막막함을 지표 삼아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꾸준할 수 없음을 핑계로 게을러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9주차까지 왔네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언제나 읽어주시는 여러분 덕분도 있습니다. 제 차력쇼를 지켜봐주고 알림 표시를...
"빵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됐고, 이만 이야기로 좀 돌아올까요?" "아, 네. 효모 수입 금지 음모론과 빵 먹기 힘든 세상에 대한 한탄은 이쯤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렇지만 역시, 빵만큼이나 만들기 어려운 음식으로는 국밥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걸요." 천년만년 빵 이야기와 그 음모론으로 밤을 지새울수는 없겠지. "그래서 빵, 이야기를 들으니 드는 ...
내가 내 집으로 들어가려는 일이 이렇게 힘들고 고된 날은 최초가 아닐까. 조금 마음에 든다 싶은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었다지만, 애인 있느냐는 질문부터 지금 나 집으로 데려가는 거 수작질 아니냐는 장난까지. 쉽지 않은 하루구나 오늘. "그래서 여기가 우주 콜로니 제일의 국밥집인가요." 식탁에 앉은 그녀는 팩 커피를 내오는 나를 보며 그렇게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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