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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경은 다시 찾아왔다. 검은 정장에, 손에는 커피 캐리어를 들고 운전기사 대신인지 후임으로 보이는 사람을 대동한 채로. 내 자취방 앞에서 막 연락받고 불려 나온 나를 가만 보다가 그러는 것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세요?” 박차경은 그대로 내 원룸까지 밀고 들어왔다. 내 머릿속에선 빠르게 변호사 선임의 필요성을 외쳤지만 내 통장이 그 말을 외면했다. ...
순흥 안씨 성을 가진 위인이 몇이나 될까. 안창호 의사, 안중근 의사, 안옥윤 의사··· 는 아니고. 하여튼 이 두 분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나는 두 분 뒤에 꼭 한 분을 끼어 말하곤 하는데, 바로 친가 할머니이신 안 여사시다. 연세는 훌쩍 구십 줄에, 안 아픈 곳 없이 성치 않다는 몸으로 애써 등산도 다니시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시다는...
난영에게. 더는 네 이름자를 쓰고도 편지지가 얼룩지지 않게 되어 몇 자 적는다. 네가 그립고 또 보고 싶다고. 네 몸 편히 뉘여주기는 커녕 눈 하나 감겨주지 못해 내내 미안했다고. 그리고 날 이끌어주어 고맙다고. 언젠가 네게 들은 말을 다른 이에게 해준 적이 있었다. 살라고. 죽어야할 때가 되면 그 때 죽으라는 그 말. 나는 그 말에 내가 죽어야할 때를 기...
살수로 살아간다는 것은 제 명을 저울 왼편에, 남의 목숨을 오른편에 올려두고 저울질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의 삶 또한 그러하였으나 한평생 이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응당, 원하는 바였기에. 영(影)으로 태어나 낙수(落首)로 스러지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이를 죽였다. 송림의 잔챙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단주가 시키는대로 때로는 하나를, 때로는 열...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었다. 그리핀도르의 새 수색꾼은 결국 뽑히지 않았다. 자진해서 연습하는 에이바를 두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는 여론이 이긴 덕분이었다. 에이바는 내심 쫓겨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기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수색꾼 자리에서 쫓겨나면 비어트리스와는 더 함께하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결과에 승복하기로 했다. "이상하다고 안 해요? 그리...
후플푸프와의 경기가 끝났을 즈음에는 크리스마스 준비가 한창이었다. 에이바는 그리핀도르의 대역 죄인답게 기숙사 식탁에서 제일 떨어진, 외진 자리에서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끔 옆얼굴로 쏘여오는 시선은 따가웠고, 그래서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가끔 잊곤 했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피하는 것이 상책임을 그도 알았다. 그리핀...
퀴디치 경기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에이바는 몹시 초조해졌다. 보통은 부상에 관한 것이었지만, 절 발탁한 사람들이 실망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에이바는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없었다. 자신에게 자신이 없다니, 말 장난 같네. 에이바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쿡쿡 웃었다. 그 웃음 소리에 메리가 도끼눈을 떴지만....
2학년 에이바가 그리핀도르의 수색꾼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어 생긴 일이었다. 머글본이 퀴디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겠으며,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에게 좋은 비행 도구가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비행 수업 시간에 돈 내기가 걸렸고, 그 곡예에 응한 에이바가 비행장 한복판에서 곡예를 했으며, 그걸 또 우연찮게도 맥고나걸 교수가 보게 된 것이...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결국엔 다시 만났으니 그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에이바와 비어트리스는 서로를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이날만을 기다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다시 입을 맞추었을 때, 헤일로에서는 강렬한 빛이 흘러나왔다. 이 이야기는 그로부터 며칠 후의 일이다. “에이바,” 악몽이 밤을 덮친 새벽, 비어트리스는 몸을 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에이바는 아주 오랫동안 비어트리스를 기다려왔다. 아크 너머로 떠났다 돌아왔을 때 비어트리스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모든 일은 이미 끝나 있었다. 그로부터 몇십 년. 에이바는 홀로 살아남았다. 안면이 있던 수녀들도 전부 죽었다. 그는 질리언의 유산을 물려받아 조용히. 그렇게 살았다. 그는 나이를 먹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았다. 헤일로는 그를 너무 단단히 지...
그날 밤에는 붉은 달이 떴다. 그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게 없는 깊은 밤이었다. 고요한 마을에는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며 캐롤이 잔잔하게 흘렀다. 꿈속이었지만 무엇 하나 생생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둡지만 따뜻한 거리, 구석에 쌓인 눈, 그리고 단란한 가족. 그러나 비어트리스는 이 다음에 펼쳐질 악몽을 알고 있었다. 까마귀 울음소리, 피, 그리고 ...
초승달이 흐리게 떠 있는 밤이었다. 모두가 잠이 들 시간이었다. 비어트리스는 바로 내일 있을 일을 떠올리며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드리엘은 내일이면 아크 너머로 쫓겨날 것이다. 주께서 함께하시리라. … 에이바도 무사할 것이다. 수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기에 밤은 어느 때보다도 길었다. 드디어 비어트리스가 선잠이 들었을 때, 방문이...
에이바는 마드리드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지나가기도 하고, 다소는 느긋하게 수다를 떨며 그를 스쳐 갔다. 에이바는 잠시 행인들을 바라보았다. 전에 잠시 왔던 도시는 방문 목적이 달라진 탓일까 더 유쾌해 보였다. 에이바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이리쉬 커피는 비슷한 것도 없던데. 이건 그냥 비엔나 라떼야." 동행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이...
이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도망쳤고, 메리의 행방을 찾았고, 실패를 거듭했고, 둘로 나뉘었고, 지하로 파고들었다. 개인적인 성취를 추가하자면 비에게서 수영을 배우고, 가본 적 없는 곳에 서 있는 것 정도. 그동안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 지하의 저항군이 된 기분을 한껏 느끼며 새로운 도시에서 물 흐르듯 사는 일은… 뭐랄까, 한가롭지만 초조했다. “에이...
사내아이라면 무릇 나이가 찰수록 얻게 되는 것이 많아지지만, 역설적으로 여자아이에게는 상황이 반대랄 수 있겠다. 과년해지기 전에는 한창 뛰어놀던 어린 것들이 숙녀라는 허물에 몸을 껴 맞추기 시작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쯤은 그런 겉치레 없이 만나는 관계가 있는 법이었다. 러셀 가의 아가씨는 아침부터 분주한 옆집의 소란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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