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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몇달치 대충
"또냐." 덩치 큰 사내가 몸을 굽히고 제 몸집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곤, 뱃속 저 깊숙한 데서 끌어올린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아담한 오두막은, 마치 대량학살이라도 일어난 것마냥 온통 피로 칠갑이 되어있었다. 살인은 일어났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피바다의 주인공은 어렵지않게 찾을 수 있었다. 피로 붉게 물든 침대...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잘못 들었나 생각했지만 소음은 지워지지 않은 채로 뇌를 뒤흔드는 것처럼 캉캉 울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정적이었는데. 소란도 소음도 딱 질색이다. 잔뜩 찌푸러든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펴며 남자는 한숨을 뱉었다. 일단 이 소음을 근절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다소 난폭한 방법이어도 상관없을...
바다의 새벽은 결코 고요하지않다. 채 빛조차 찾아들기 전의 항구는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에만 의지한 채로도 왁자지껄한 부두는 어느 때보다 바빴다. 출항 준비를 한다 짐을 싣는다 먼길 떠나는 가족들을 배웅한다, 선박의 보수용으로 쌓아둔 목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위험천만한 움직임까지. 그들 중 누구도 바다 위를 메우고 있는 안개에 대해서는...
제 뿌리를 끊어내고 하염없이 떠도는 것은 충동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썩 좋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뿌리를 끊어낸 것은 말 그대로 충동이었다. 분노, 경악, 두려움, 슬픔 따위에서 비롯된, 눈을 가리고 귀를 틀어막게 만드는 충동. 그리하여 결국은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게 만들었던 충동. 지니고 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슨 정신으로...
관뚜껑은 결코 열리는 법이 없어 유족들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허용하지 않았으며, 그 비참함을 가리기 위해 색색의 화려한 꽃이 사자의 얼굴을 대신했다. 기묘하리만치 화려한 장례는 마치 축제와도 같았다. -관짝에 시체가 안들었는데 당연하지. 남자는 그렇게 내뱉으며 평소와 달리, 조금 난폭한 기세로 손에 들린 나무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서슬에 술이 찰랑이며...
마른 나뭇가지를 밟아 분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총신을 정비하던 손을 멈추고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작은 오두막은 혼잣몸을 뉘이기에는 적당했으나 벽이 얇았으며 외부의 소음을 가려주지도 못했다. 버석버석 메마른 낙엽과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무거운 발소리와함께, 절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짚이는 곳은... 많았으나, 구태여 이런...
나는 내가 죽으면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사라지긴 개뿔이 사라져. 죽어버린 몸뚱이 안에서 눈 뜨며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대상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지막 기억은 확실치않았다. 그럴만 하지. 누가 뒤지는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해, 그럴 정신도 없었고. 다만 짐작이나 해볼 따름이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는 시체가 어떻게 취급되는지야 불보듯 뻔한...
등 뒤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드니, 검게 어둠이 내려앉은 숲을 저 멀리 횃불의 무리들이 일렁이며 불살라먹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관솔이 타는 내음과 생선기름으로 적신듯, 비릿한 썩은내가 풍겨왔다. 그러고보니 바다가 가까웠던가. 이번엔 뭐더라. 잠시 먼데를 응시하며 생각을 가다듬던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흔들며 손에 쥐고 있...
끔찍한 적막 속에서 떠돌이는 눈을 떴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공기를 만끽하며, 남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타고남은 모닥불의 잔해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성은 얼른 짐을 챙겨 이곳을 떠야한다고 저를 다그쳤지만, 겨울의 찬 공기에 잔뜩 굳은 몸은 겹겹이 두르고 있던 모포며 코트안으로 좀 더 구겨들어갔다. 장작이 남았던가-?잔뜩 물먹은 솜마냥 무거운 눈꺼풀을 ...
2019.02.12 03:56 남자가 태어난 건 눈이 많이 내리던 늦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장자, 그것도 가문을 이어받을 적통의 후계자는 온 사위가 눈으로 묻혀있을지라도 뭇사람들의 환희와 축복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젊은 아이 아버지는 눈 마냥 새하얀 아이에게 그게 걸맞은 이름을 붙이곤 기뻐했다. 피온fionn. 새하얀 눈을 닮은 아이의 이름이었다. 어머니의...
의식이 부유한다. 저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가 반짝 떠올랐다가, 또 다시 질척한 어둠에 발목이 붙들려 끌려들어간다. 제 발목을 그러쥐고 제 몸 위로 켜켜이 쌓이는 암흑은 칠흑이되 칠흑이 아닌 것이었다. 한 순간, 한 때의 빛이었다. 약하게나마 스스로 빛을 뿌리던 별조각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제대로 움켜쥐지 못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순간, 대의를 위해 뿌리쳐...
김독자는 애초에 무대 밖의 인물이었다. 관객? 관객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다. 무대 위로 끌려들어오고 난 이후로도, 김독자는 그 관객이라는 선을 남겨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확언하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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