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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아빠 왔다.” “아빠다, 아빠!” 그리 말하며 케이시를 맞이하는 꼴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한순간, 케이시는 저도 모르게 패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있는지 고민하고 말았다. 아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다. 아이 앞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말랑말랑한 볼을 가볍게 꼬집으며 유쾌하게 웃는 저 남자의 과거는 문란했으니까...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농간인지……. 쉽사리 이해할 수는 없지만, 평소와 같이 침착하고 여상한 얼굴로 해은은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애정 어린 담담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얼굴 그 어디에서도 당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일이 어쩌다 일어난 것인가, 하는 원인규명보다도 제 눈앞의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일이 더 급한 일이었으니. 무엇보다도, 제 몫의 당황...
알량한 동정심을 품은 당신에게 기만당할 것이라면, 그것이 다정함의 형태만큼은 아니기를 빌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검으리만치 깊은 바다를 한껏 눈에 담았던 일을 당신의 우스운 변덕, 그 이상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최악이었던 처음이 점차 흥미로 물들어간다고 한들, 당신에게서 그토록 거슬리는 것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것이 때늦은 것임을 알...
그래요, 제가 물려받은 피는 그러한 것입니다. 특별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혈통이지만 보잘것없는 재주 하나는 타고나, 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무엇이라 하던가요. 대지에 뿌리를 내린 것과 공명하는 힘이라 했던가요, 태양을 떠받들며 살아가는 것에게 삶을 부여하는 능력이라 했던가요. 그들이 무어라 떠들어댔든,...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칸델라 레이. 초대받은 특별한 사람만 갈 수 있다는 독주회의 초대장을 손에 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혹은 운명이었거나. 초대장에 적힌 주소가 낯설다면 우연, 익숙하다면 운명인 걸로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마키아벨 재단 산하의 건물. 1994년, 붕괴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고아...
호화 여객선에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마다의 설렘과 떨림을 껴안고 앞으로 벌어질 선상 파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카론은 그들을 응시했다. 보았으나, 본 적 없는 그들을. 시간을 돌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주최자-마키아벨 스스로도 그 일을 알고 있었고, 초기의 약속과는 다르게 ‘아무런 일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한계였다. 사람이 죽고...
저명한 사회학자, 베르타 칸셸로의 손자-에르도아 칸셸로. 그 역시도 언젠가는 가족이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의문의 사고와 실종과 자살이 있기 전까지는. 십 수 년의 세월에 걸쳐 혼자가 된 그는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의문의 질병에 시달리던, 사랑하는 동생이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 화면 너머에서 무감정한 표정으로 자...
모든 인류가 간절히도 바라왔으나 아무도 손에 넣지 못한 것. 실현하는 순간, 세상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불로불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터였다. 죽지 않고 늙지 않는 몸을 가지는 것이 대한민국의 제약회사, 우영제약의 CEO인 권재혁의 꿈이라는 것도,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다치지 않고 살고자 하는 욕망, 망가지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
일견, 천박해 보이기도 하는 남빛 드레스를 걸친 그녀가, 과거에는 꿈꾸지 않았던 행동, 더 과거에는 꿈꿀 수조차 없었던 장소. 눈을 찌르는 조명과 귀를 찢는 음악이 장악한 장소와 격리된 고요하고 고요한 방. 칼립소의 비호가 있는 한,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아주 내밀한 감옥. 검은빛의 스트랩 힐을 신은 발을 움직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앉았다....
한풀 꺾인 정오의 햇살이 알음알음 스며들 무렵, 동화 속에 나올법한 도심 속 벽돌집의 주인은 바삐 움직였다. 이번 휴일에도 큰 일정은 없으니 당연히 서점을 열 생각이었건만, 이렇게 갑자기 초대를 받을 줄이야. 하나로 묶은 머리가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흔들렸다. 서점 곳곳에 비치된 식물들은 물을 머금고 한껏 싱그러운 풀 내음을 풍겼다. “바쁘다, 바빠…….”...
눈앞에 거울이 놓인 듯, 나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 낯선 일도 아니기에 조급하게 놀리던 손을 잠시 멈춰두고, 가만히, 형형하게 빛나는 죽은 금빛을 바라본다. 아주 간혹, 태양의 밝음 한 자락조차 손에 쥐지 못한 밤이 내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상념이기에. 현재의 일을 멈춰두고, 잉크가 닳아가는 펜을 내려두고, 나는 가라앉는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꽤 오랜만이라고 생각합니다.언제나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시나 노래를 빌려 이 절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매번 두려워 도망치고 오로지 글로써 당신에게 진실을 맹세할 뿐입니다.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아마 당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도망치기만 하는 겁쟁이였으니까요.그렇지 않은데...
캐리어를 쥔 손이 아팠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도리로도 덮이지 못한 양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어있으리라는 것을. 하아. 숨결을 따라 입김이 새어 나왔다. 탁했다가, 이내 투명하게 흩어지는 그것을 한동안 바라보다 발을 돌렸다. 남은 물기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은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웠다. 무작정 도달한 상점가....
https://youtu.be/fiS529zCRDQ 당신은 나의 뿌리를 알고 있나요. 아니, 이건 비단 당신에게만 하는 질문이 아니에요. 그 누구도 나의 근원을, 나의 시작을 알지 못한다는 확신이지. 나는 나의 선조도 알지 못하고, 그렇기에 축복조차 받지 못한 채 태어나 길을 전전하며 살아왔어요. 가진 것이라고는 볼품없는 몸뚱어리와 푸른 머리칼, 금빛의 눈...
들어가며 우선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자. 나는 뮤지컬 특유의 갑작스러운 전개-특히 노래를 부르며 갑자기 이야기가 넘어가는 것에 취약한데, 취향 저격 포인트로써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흐름을 따라가고 수용하는 데 능숙치 못하다는 뜻이다. 소설처럼 천천히, 상황과 심리 묘사가 함께하는 전개라면 모를까. 물론 이런 흐름이 나에게는 단점이자 약간의 불편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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