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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원이 바삐 뛰어대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빠르게 달렸다. 하씨. 이민혁한테 3시까지 무조건 도착한다고 약속했는데. 호언장담 해 놓고 늦으면 일주일은 이걸로 찡찡대며 우려먹는 꼴 받아줘야 하니까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형원이 거친 숨을 헥헥거리며 손목 시계를 다급히 바라봤다. 정말 다행히 3시 1분 전이었다. 의국 문을 당차게 열어 졎헜으나, 안에 민혁은 없...
인공판막 치환술에 대한 소식은 국내외 의학 저널을 떠들석하게 달구었다. 난이도 높은 수술을 더블 보드를 가진 의사가 집도했고, 어시스트한 레지던트가 응급의학과라는 사실은 관심을 얻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높으신 분들이 의도한 대로 관심은 한석대 병원으로 쏠렸다. 정신없는 오전 시간이 지나자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한 시간 뒤면 또 외상 수술이 있어...
“야, 아침 10시야. 집에 안 가냐?” 기현의 말에도 형원은 전혀 미동이 없었다. 기현이 팔을 질질 잡아 끌자, 그제서야 눈쌀을 찌푸리며 안경을 찾기 위해 책상 위로 손을 더듬거렸다. 몇 시. 묻는 형원의 목소리가 아침이어서 그런지 확 잠겨 있었다. 피곤이 드리운 눈을 겨우 떠서 스케줄표를 들여다 보더니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아, 저거 보고 있으니까 골...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형원은 벽에 걸린 시계에 눈을 뒀다가 애써 몸을 움직였다. 30분 채 못 자고 바로 컨퍼런스가 잡혀 있었고, 끝나고 인턴 교육을 하며 서류만 쳐다본 게 무리였는지 피로가 몰려들었다. 응급실은 조금이라도 고뇌할 틈을 안 주었고, 시간은 요즘따라 누가 잡아 당긴 것처럼 빨랐다. 안 그래도 응급실 업무니 당직이니 해서 신경 쓸 게...
한때는 그런 기대도 했었다. 이민혁이 평생을 꿈꾸던 완벽한 가족이라는 것을 채형원과 이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퇴근 길의 차 안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영화 한 편 보고, 서로의 품 속에서 잠들고. 이런 소소하면서 행복한 미래를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꿈을 꿨다. 이사가 며칠 앞당겨졌다. 이직 자리가 생각보...
전말을 모조리 알게된 형원은 어떻게 해서든 민혁이 있는 곳을 찾아낼 기세였다. 기현은 처음엔 갑자기 어딜 간다고 그러냐며 만류했지만, 결국엔 다 말해줄 테니 우선 진정하라며 형원을 자리에 앉혔다. 끝까지 이민혁 부탁대로 모르는 척 잡아떼려 했지만 너무도 간절한 친구의 얼굴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기현은 빠르지 않은 목소리로 지금까지의 이...
이민혁의 퇴사는 한석대병원에서 꽤 큰 이슈였다. 여러모로 뒷소문도 총제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쩌다 보니 아버지에게도 통보하고 탈출한 꼴이 됐는데, 이 정도의 감정적 폭발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정도였다. 채형원의 장애물이 되는 게 이민혁에겐 더 큰 문제였다 보니 다른 건 감흥도 없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걸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물론 지칠 줄 모르는 선...
PAST 이별을 고하고 오랜만에 만난 날. 목소리가 점점 잠기기 시작하던 형원은 기어이 그 큰 눈에서 눈물을 떨어뜨렸었다. 그냥 다 털어놓을까.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옆에 있는 애는 사촌 동생일 뿐이고, 호텔에서 본 여자는 선 상대이긴 하지만 거절했다고. 하지만,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을 때 이미 형원은 돌아서 싸늘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
눈을 뜬 민혁은 벌써 중천에 뜬 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습관처럼 이른 새벽 눈이 떠지곤 했는데 지난 한주는 그만큼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일어나는 게 힘들 정도로 온몸이 욱신거렸는데, 특히 오른 팔에 시뻘건 멍이 들었다. 다친 팔을 모르고 부딪혔는데 동심원처럼, 빨갛고 푸르죽죽한 멍이 군데군데 들어 버렸다....
서로에 대해 아는 정보는 한 가득이지만, 말 그대로 어거지로 끌려온 자리인 만큼 민혁은 풀착장을 갖췄다. 단정하게 입었을 리가 없고, 아버지가 뒷목 잡고 아주 기함할 만한 양아치 느낌으로다가 말이다. 오랜만에 옷장을 싹다 뒤져 대학 졸업과 동시에 케케 묵혀 둔 -범상치 않은- 옷들을 꺼내느라 고생 좀 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선 상...
PAST 채형원은 억울해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민혁이 채형원을 처음 알게 된 건 훨씬 전이었다. 입학하고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의대에서도 라인이니 뭐니 갈리고, 자연스레 그룹이 나뉘었다. 의대 특성 상 해외고, 과고, 영재고 등 내노라 하는 애들이 그대로 올라왔고, 노는 물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어느 면에서도 빠짐 없는 민혁은 그 또래들 중에서도 쉽게...
PAST 일방적인 이별을 당한 지 보름쯤 되었을까. 우연히 길에서 이민혁을 마주쳤다. 한참 앓아서 그런지 아직 걷는 것도 불편하고, 머리가 계속 아팠다. 진통제라도 하나 사 먹을까 하고 약국을 찾았는데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피 방에 가면 병원에서 처방 받아 놓은 약이 있으니 그냥 참기로 했다. 배도 고프지 않고, 뭘 먹을 생각조차 못 했다. 우두커...
길고 얇은 병에 가득 차 있던 소주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반 이상 비워지는 걸 보며, 기현이 옅게 웃었다. 그러자 형원이 민망한 듯 뒤이어 파전을 찢어 입 안에 넣었다. “유기현.” “응.” “나 이민혁한테 흔들려.” “뭐?” “엄청.” 생전 꺼내지 않던 이야기였다. 민혁과 썸 비슷한 걸 탈 때도, 그리고 연애를 시작한 그 순간에도, 친구로 지내온 ...
수술실 옆에 마련한 보호자 대기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회장이 있었다. 시작은 엄포를 늘여 놓는 기싸움이었다지만, 믿고 맡겨준 만큼 완벽하게 끝내리란 다짐으로 형원은 회장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수술, 잘 될 겁니다. 들릴락 말락한 작은 목소리에 회장은 전과 달리 살짝 웃었다. 이동 침대 위로 동주의 몸을 옮기고, 수술실로 끌었다. 자동문 앞에서 대기하...
형원의 연구실은 정말 깔끔했다. 2곳곳에서 형원의 성격이 묻어났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 눈꺼풀을 닫고 잠시 쉬던 형원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마를 짚으며 짓눌린 눈을 떴다. 채형원이 연구실에 따로 부르다니. 민혁은 이게 당최 무슨 일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형원은 앉아, 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부터 내가 널 테스트 할 거야. 가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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