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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보자. 내가 렁스 초연을 보러 간 건 순전히 본진이 2년만에 무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치고는 초연 렁스의 기억이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흐릿하게 남았다.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지 않고 순간적인 목소리, 형태, 동작, 그리고 향기처럼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타투. 마치 몇 걸음씩 간격을 두고 새긴 타투처럼. 내 손목에는 달 일곱 개가 있다....
삶에 대해 고민해본 적 있어? 선배가 물었을 때, 주혁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그는 당연히 삶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도 했지만 선배 앞에서 입을 떼려니 그 모든 건 하잘것없는 몽상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이제 겨우 대학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인 풋내기의 생각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에 도대체 누가 관심을 가지려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없다고...
Unspent 다 쓰이지 못한. 포스너는 아마 아주 많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꿈이었거나 희망, 사랑, 어떤 감정과 기억, 순간, 고통. 처음 특별반 합격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케임브리지 합격 통지서를 받아드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썩 빠르지 않은 속도로 천천히 말을 할 때마다 그 무언가가 서서히 한 조각씩 떨어져나가는 게 내 눈에 고스란히 보...
케플러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안경을 썼고, 투명하고 반질반질한 렌즈가 없다면 그의 세상은 언제나 아주 흐릿하게 뒤섞인 은하수처럼 보였다. 우유와 으깬 각설탕을 컵에 붓고 실컷 흔든 것 같은 색깔. 그만큼 모든 게 뿌옇고 또 형체가 없었다. 먼 곳을 보면 제각기 다른 빛으로 물든 등불이 자기들끼리 뒤섞이며 ...
아래 세 극 중 한 극의 작가님을 저희 집에 모시고자 합니다. 저는 세 작품 다 본사지만 특정 캐슷 내지는 페어만 관람한 관계로 아래에 기재해두겠습니다. 대체로 선호하는 캐슷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다만 극 하나 제외하고는 어느 캐슷으로 보셨어도 무방합니다. 캐해가 갈린다고 해도 수용 가능한 선입니다! 메리 셸리(2021) 이예은 메리 / (페어로 필요...
옛날옛적에, 곰이 시가를 태우던 시절에, 한 꼬마 아가씨가 살았습니다. 아주 예쁘고 착하고 순해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귀여운 소녀였죠.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맞아요, 전쟁이 터졌습니다. 정확히는 혁명과도 같은 전쟁이었죠. 무언가 문을 두드렸을 때 이 꼬마 아가씨는 잔뜩 겁에 질렸고, 자기 아빠를 쳐다봤습니다. 아빠는 세상의 영웅이었고, 왕자...
어떤 날, 어떤 시간. 그것이 뒤쫓아오리라는 사실을 정말 몰랐던 건 아니지만 모든 인간들은 그걸 정말로 모른다. 이유요? 이유야 뻔하지. 그걸 알면서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가 있겠어요? 그냥 확 미쳐버릴걸. 아, 그래서 세상에 이렇게나 미친 인간이 많은지도 몰라. 그렇잖아요. 친구를 고발하고 이웃을 팔아넘기고 남의 목숨을 방탄복 삼아 날아드는 눈먼 총알을...
어느 해의 가을밤은 참 길었다. 11월의 스산하고 축축한 바람이 문가를 서성이면서 길을 잘못 든 손님처럼 간간이 목소리를 높일 때, 갈릴레이의 집으로 가난한 철학자의 집을 닮은 편지가 한 통 날아들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한참 늦어진 연락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제때 시간을 맞춘 셈이 됐다. 이탈리아와 독일 사이의 시차란 대충 그런 것이었으니까. 친애하는 갈릴레오...
당신은 한 번 입었던 걸 다시 입지도 않으면서 왜 전부 다 드레스룸에 보관해두고 있습니까. 존 폴리도리가 그렇게 질문했을 때 ― 그로서는 아주 드물게도 ― 바이런은 간만의 한가로운 작업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즉, 책상에 기대어 앉아서는 시덥잖은 연애 편지에나 어울릴 법한 문장 몇 개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존도 질문을 던졌...
유진 리의 악몽은 아주 단순한 패턴으로 시작한다. 처음은 제이드의 목소리다. 묵직한 실크처럼 귓가를 스치고 떨어지는 목소리에는 원망도 애정도 깃들어 있지 않다. 다만 깨끗할 정도로 명료하기 그지없는 단 하나의 감정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살의. 그걸 감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유진 리는 알지 못한다. 그는 살면서 누구에게도 살의까지는 느껴본 적 없는 사...
김범신 베드로 신부가 아주 오랜만에 일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두 종류의 환대를 받았다. 하나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을 책임지고 있는 수도원장의 폭발과도 같은 힐난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앞둔 설렘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이영신의 자책이었다. 어느 쪽이든 그의 신경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범신은 자기 스스로 선택했던 세례...
* https://l0v3-ez-m1n3.postype.com/post/12900556 상님 글에 부쳐 썼습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탤릭체 대사는 인용문입니다. 강우석은 뭘 하는 놈일까. 아니, 그 전에…… 뭐하는 놈일까? 어디서 이런 게 굴러들어왔지? 장담컨대 태수, 그러니까 박태수의 인생에서 그런 고민이 없었던 적은 강우석을 만난 이래로 존재하...
언젠가 철학자 미셸 푸코가 얘기한 적이 있죠, 예술의 재현에 대해서. 다채로운 존재들 간의 동일한 성격과 극명한 차이를 구분하고 사유하는 것이 얼마나 유의미한지. 복잡하고 흥미로운 논의인데 나는 그걸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술의 재현과는 하등 무의미한 문제입니다.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은 것을 얼마나 복제해야 그 본질에 가장 가까워질까. 만약 ...
L'Oiseau de feu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잿더미처럼 타오르는 새, 그 틈에서 다시 날개를 내밀어 창공을 방황하는 새, 너무 차가운 심장을 가져 불꽃이 없으면 날개가 굳어 추락하고 마는 새, 그런 삶이 아름답다고 누군가 말해줬다면 믿었을까, 아니면 의심부터 하고 봤을까. 사람은 거대한 운명에 비해 너무 나약하고 보잘것없어 그저 흔들리고 말지. 끈에 ...
우리 잠깐 죽음에 관해 얘기해볼까요. 왜요? ……. 짧은 정적 속에서 남자는 어떤 분명한 거부를 읽었다. 두려움에 가까운, 아주 막연한 감정이 눈동자 한 쌍 뒤에 도사린 채 뱀처럼 그를 바라본다. 싫어요, 하고 대답하지 못해서 그저 제자리에 멈추기만 한 말이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잠깐이면 돼요. ……얼마나 잠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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