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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켜졌다. 까만 것이 움직이는 뒤쪽에 집으로 보이는 배경이 보인다. 검은 장갑을 낀 것으로 보이는 손이 화면 앞에서 몇 번 휘적이다가 멀어진다. 잘 찍히나. 혼잣말인 듯, 남자의 시선은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있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처럼 화면이 덜컹거리기를 수차례. 초점이 흐려졌다가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한 화면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폰으로만 찍다가...
-인드찬드바유(인혼, 바혼 요소 있음), 아슈마루, 바루우르, 란마루 모니터 한 켠에 띄워진 숫자가 고지를 향했다. 59분 옆에서 차츰 올라가는 숫자가 50을 넘기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57. 58. 59. 그 순간, 동시다발로 마우스를 누르는 소리가 PC방 곳곳에 울렸다. "아싸! 올클!" "닥쳐." 찬드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의 모니터는 일...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면하니 이곳이 바로 명당이라- 할 수 있기는 개뿔. 뒤에 있는 것은 꿈쩍을 안 하고 앞에 있는 것은 해일처럼 덤벼오니 이게 바로 죽을 맛이다. 젠장. 나는 왜 이놈들 사이에 껴가지고. 은율은 지끈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틈을 보였다간 앞에서 당장이라도 잡아먹을듯이 눈을 부라리는 용마가 저를 지나쳐...
먹물을 머금은 붓이 결 좋은 종이 위에 유려하게 미끄러진다. 지고하신 태자 전하의 꾸준한 가르침 덕에 제법 태가 나는 모양새에 그렇지 못한 결과가 나왔으니, 글 깨나 쓴다는 문장들이 본다면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쏟을 걸작이 나왔다. 화성은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들었다. 악필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글자에 마르지 않은 먹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한층 더 ...
종국 특이점이 소멸되었다. 인리가 완전히 수복되었고 세계는 지켜졌다.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이로써 세계는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을 하고 인류는 자신들이 주어진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역할을 마친 영령들은 미래를 살아갈 그들을 축복하며 하나둘 좌로 돌아갔다. 미련없이, 라고 말한다면 거짓이었다. 1년. 칼데아의 특수한 소환에 의해 생전, 혹은 언젠가의 세계선에...
흡혈귀인 것만으로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라는 어른들의 사정으로 각 서뱀프와 그의 이브에게 통보장이 날아왔다. 음반을 낼 테니 각자 준비를 해오라는 것이다. 친절하게 가이드 녹음과 가사까지 보내주셨다. "이런 배려 필요 없어!" 귀찮은 일이 늘어났다고 직감한 마히루가 머리를 감싸 안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비명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
눈을 떴을 땐 이미 그림 속 세계였다. 누가 한 짓인지 특정하기는 쉬웠다. 7대 불가사의 4번째. 애당초 인간을 그림 속으로 빨아들이는 괴이는 이 학원에서 하나뿐이라 달리 범인이 될 존재는 없었다. 여기까진 쉽게 짐작했지만 그 다음이 막막했다. 4번째가 어째서 자신을 가두었는가. 딱히 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둬질 정도로 원한을 산 기억도 없다. 하나코는...
오늘 밤은 달이 유난히 컸다. 뉴스에서 몇십 년 만에 뜬 슈퍼문을 관측할 수 있다느니 떠들어댔던 것이 떠올랐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왜 볼 때마다 몇 십년 만이라는 말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날씨가 매우 좋아 관측하기 쉬울 거라는 예보대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별빛마저 잡아먹은 달이 창밖에 드리워 창틀이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
카이바가 명계에서 돌아왔다. 모쿠바의 말로는 자다가 뭔가 인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더니 바닥에 카이바가 쓰러져 있더란다.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지만 명계에 다녀온 여파인지 기력이 다소 쇠해져서 지금은 병실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다고 한다. 소식을 전하는 모쿠바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카이바가 없는 동안 의젓하게 회사를 관리한 모쿠바였지만 내심 형에 대...
해평선 너머에서 짠내가 물씬 풍겨온다. 여긴 또 어딜까. 사방이 바다다. 어느모로 보나 자기가 서 있는 땅이 작은 섬인 건 확실했다. 근데 그것만으로 여기가 어딘지 짐작이 되겠냐고. 보이는 것이라곤 바다와 수풀, 그리고 섬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건물. 낯설지 않는 풍경이다. 예전에 다녔던 듀얼 아카데미와 구성이 닮았기 때문일까. 아카데미는 전세계 곳곳에 ...
고운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물 흐르는 듯 천을 자르고 꿰매는 솜씨가 상당히 능숙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라일라가 탄성을 질렀다. "대단하다, 지브릴." "딱히." "아니야. 정말 대단해. 지브릴은 뭐든 잘하는구나." 지브릴은 덤덤했지만 라일라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라일라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네모난 천에 불과했...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달이 삼켜진 하늘, 찌르르 우는 벌레들도 숨을 죽인 밤. 휘날리는 나뭇잎만이 부산스레 요동쳤고 희미한 은빛 잔별의 파편이 이파리 위를 노닐었다. 하아. 여름이 다가오는 밤의 공기는 축축하다. 딱 이런 밤이었다. 그날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일말의 새벽빛만이 시나브로. 기나긴 악몽이 지나고 자신은 도망쳤다. 잊고, 외면하고, 숨어버렸...
평화롭고 뜨거운 한여름. 운동장에서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학생들이 이리저리 달리면서 고함을 쳤다. "야! 패스해, 패스!" "아악! 붙지 마! 끈적거린다고, 꺼져!" "수비수 막아! 더위 먹었냐? 왜 공이 날아오는데 서있기만 해!" "마루나한테 공 주지 마라고! 저 새끼 날아다닌다고!" "그게 마음대로 되냐? 네가 앞에서 뛰어봐, 개자식아." 앞서 말했듯 한...
생명에는 수명이 있다. 물건은 낡아 스러진다. 시간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 없으며, 바래지는 것 없으니. 쥬다이는 누구보다도 그 진리를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매번 이별은 아프다는 것도. 한때는 영원할 것 같았던 당신을 과거에 묻고 나아가야 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좋은 곳으로 가셨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남겨진 사람의 마음은 그게 아니라서....
유우야는 단말기에 설치된 어플리케이션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에게로 모인 시선이 부담스럽다. 그렇지만 기대에 찬 그들의 시선이 도리어 설렘이 되어 가슴이 뛰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손끝이, 새로 깔린 앱을 꾹 눌렀다. 전자 세계로 빨려 들어갈 듯한 효과음이 먼저, 뒤를 이어 유희왕 듀얼 링크스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열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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