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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와 두 번째 작전이 실패한 지금, 남은 것이라곤 계략을 펼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방법까지 쓸 생각은 없었던 바헨은 황녀가 남기고 간 강묵차까지 묵묵히 마시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난이는 결국 울음을 터뜨려서 채숙이와 상의한테 맡겨 놓고 적막한 궁 안에서 한숨만 내쉬는 중이었다. ‘사람이 이리 삐뚤게 굴어도 되나.’ 황실에 걸맞은 사람이 아...
그날 바헨과 함께한 밤 산책에서 한기를 너무 많이 맞은 탓인지 화율은 잔기침이 늘었다.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챈 내관이 호들갑 떨며 의원을 불렀으나 단순히 기가 허약해지셔서 그러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다. 화율 역시 괜히 일 키우지 말라며 내관을 혼냈으나 그로부터 일주일 뒤, 그 내관의 걱정이 맞아떨어지게 됐다. 한 나라의 아비가 갑...
황실은 비록 몰랐다고 한들 하나뿐인 가족이 죽을 수도 있었던 거래를 했다. 그 결정을 내리는 인물은 다름 아닌 화율이었으므로 황제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더 하락했다. 바헨은 이득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자마저 내팽개쳐버리는 황제를 떠올리며 서적을 아무렇게나 꽂았다. 서고를 완전히 나서기 전에 혹시나 매가 왔나 싶어서 돌아봤으나 그마저도 우울한 바헨의 기분을 알...
천화제국을 통치하는 황실엔 현재 딱 두 명의 자손만 남아 있다. 첫째로 태어난 자가 현재 황제라 일컫는 화율이며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난 자가 유일무이한 황녀, 화연이다. 그녀는 본래 자식이 드문 황실에서도 유난히 귀한 여인으로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상황에 따라 황제인 화율보다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지금은 선대 황제 부부가 모두 돌아가셔...
바헨이 궁에 들어온 지도 2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그녀는 후궁의 지위를 이용해 궁에서 돌아다니는 다양한 떠돌이 소문을 수집했다. 주된 수집처는 주로 채숙이었으나 자기 수하에 들어온 다른 시녀들도 그렇게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채숙이보다 두 살 많은 상의는 유의미한 정보는 주지 않더라도 궁 내에 퍼진 사랑 얘기라면 누구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알...
천화제국은 동쪽에 존재하는 대륙 중에서도 유난히 큼지막한 지형으로 총 서른네 개의 도시로 나누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농어촌이 풍부하게 발달했고 삼면 중 서쪽과 남쪽, 두 면이 바다와 맞닿아 다른 나라와의 교류도 수월한 편이다. 무역이 주로 이루어지는 도시는 서남쪽 중심부인 ‘어령’이며 화엦가 바헨한테 하사한 호석이 유일하게 매장된 도시는 ‘유천’이다. 그...
수데르한테 건네받은 상자는 그날 밤 황제한테 넘어갔다. 황제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상자를 소중하게 쥔 채 낙운도를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낙운도엔 그동안 봤던 나룻배보다 몇 배는 커다란 선박이 찾아왔다. 펼쳐진 돛엔 천화제국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선박이 정차하자마자 무수히 많은 일꾼이 내렸다. 그들은 천화제국 황실 소유란 걸 여실히 표출하듯 돛처럼 ...
황제와 약속했던 날이 도래했다. 수데르는 동이 트기가 무섭게 기루 문을 열었다. 이른 손님인 줄 알고 부리나케 뛰어온 청이 수데르를 보고 몸을 숙였다. 그는 어언 일이냐고 묻는 청의 말을 무시하고 가서 바헨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청은 금세 버선발로 마루에 올라가 종종걸음을 놓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여명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소금...
평온한 일상은 수데르가 틈만 나면 바헨을 방문한다는 점만 빼면 다를 것 없었다. 그 횟수가 일정하진 않았으나 어찌 됐든 그걸로 인해 단골이 줄어들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녀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본디 진귀한 물건일수록 쉬이 가질 수 없는 법이었다. 바헨이 수데르와 하룻밤을 보낼 때마다 그녀를 품어야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늘었다. 언제라도 좋으...
낙운도엔 한 달에 한 번씩 긴 밤 손님이 싹 사라지는 날이 있었다. 보통 그런 날은 둥그런 보름달이 검은 밤하늘에 눈처럼 박혀 있었다. 달마다 다르긴 했으나 그날이 오거든 손님 측에서 늑대 피를 물려받은 인랑족이 혹여나 난폭해질까 봐 먼저 몸을 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만 바헨만큼은 가뭄 속 단비처럼 지칠 때쯤 찾아오는 휴식날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
중천에 떠올랐던 태양이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내려갈 즈음, 수데르의 성인식 연회를 치른 기생들은 아무 탈 없이 복귀하는 중이었다. 다른 이가 걱정했던 것처럼 유혈사태나 인명사고는 나지 않았다. 그에 상응하는 사례 역시 없었다. 바헨이 얻고자 했던 인랑족 단골은 물론, 아주 적은 내부정보조차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완벽한 공수래공수거였다. 우느라 기운...
연회가 한 꺼풀 꺾이면서 인랑족 뒤를 따라 4층으로 내려온 기생들은 복도에 울려 퍼지는 신음을 듣자마자 기함했다. 간간이 밭은 숨이 섞인 그 소리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들렸다. 연회에서 악기를 연주했던 기생이 왼손으로 치마폭을 잡더니 남사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바헨님이라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전전긍긍한 채 소리...
소위 ‘인랑족’으로 알려진 종족에 관한 정보는 지극히 한정적이고 제한적이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마치 전래 동화 같은 몇 안 되는 정보를 대대손손 물려주었으나 그 이상을 파악하려 들진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는지, 어째서 태어났는지, 인간 사상과 다른 점은 또 무엇인지 등 밝혀내지 못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파악...
사람은 기본적으로 생명체를 두 종류로 나눴다. 하나가 자신과 같은 인간, 둘이 개, 고양이, 소, 말 따위를 통틀어 지칭하는 짐승이었다. 두 무리는 공존할 수 있을지언정 태생적으로 융합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는 자연의 섭리요, 하늘이 내려준 지고지순한 뜻이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영원히 지속됐고, 그 억겁 동안 돌연변이 개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
樂雲島. 즐길 락, 구름 운, 섬 도자를 써서 낙운도였다. 직역하자면 구름 같은 섬에서 가무를 즐긴다는 뜻이었고 아주 먼 옛날엔 하늘 위의 세계, ‘천상’이란 이명도 있었다.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낙운도는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졌으며 제국에선 쉬이 볼 수 없는 생명체가 생식했다. 이곳에 살았던 몇 안 되는 사람들도 자연과 어우러진 채 간간이 놀러 오는 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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