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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제일가는 사과나무를 가진 집의 첫째 이삭은 읽기를 참 좋아했다. 그런데 이 읽기란 것이 기묘한 게, 책이나 대자보 따위가 아니라 종이를 두고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짓이었다. 이삭이 읽는 종이는 언제나 왼쪽 위 귀퉁이가 세 번 접힌 누런 양피지였는데, 잉크는커녕 흑연 하나 묻지 않은 채 비어 있었다. 빈 종이를 하도 읽어댄 탓에 머리에 번개를 ...
드와이트는 제 키만한 대리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규칙 없이 일그러진 무늬, 기초 가공을 마쳐 매끈한 표면 위로 흐릿한 윤곽이 비쳤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대리석에 비쳐 반투명한 곡선을 그린다. 검은 대리석, 이제까지 도전한 적 없는 소재였다. 그러나 겁먹을 리가 없다. 엄지와 검지를 모아 흰 분필을 집어든 그가 크게 팔을 휘둘렀다. 뒤편에서 지켜보던 줄...
*배경음악 (본문 내용과 큰 관련 없으나 플레이를 권장합니다.) 보았다.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예술가라면 으레 보는 환각도 이상향도 아니다. 외려 가장 끔찍한 것이다. 쉽사리 뭉그러지는 짙은 안개 속 번쩍이는 빛에서 드와이트 스펜서는 분명히 보았다. 단언컨데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쉽사리 뭉그러지는 재료라는 것이 그러하다. 절망, 우울, 갈취, 비명......
어쩌면 절박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신 에티스는 집에 돌아와 목도리를 풀며 생각했다. 당신을 생각하는 내내 그랬을 지도 몰라. 짙은 회색 목도리 끝자락의 작은 술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미션 중에 선물로 받았던 것 같은데. 생각은 곧 시각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색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피앙세를 연상시키는 아...
루트설명... 대학부속서점사장+짝사랑+첫권유에 그래도 걱정된다고 미적거리다가 결국인계옴 가을 밤의 찬 공기가 뺨을 할퀴었다. 휴는 무의식적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밤이슬을 머금어 싱그러운 풀이 손바닥 가득 짓눌렸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반쯤 찬 달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별이 없는 건 이 세계나 저 세계나 같은 모양이지. 그 원인은 판이했음에도, 휴...
에단. 당신을 끌어안고 있으면 나는 정말로 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구성된 모든 재료 중 단 하나도 인간의 파편이 아니며 인간이길 바란 적 없으나 나는 정말로 그러한 기분을 느낍니다. 당신의 호흡을 따라 흉곽을 부풀렸다 내려놓고, 당신의 심장 박동이 내 껍데기의 안쪽을 울리고, 당신의 온기가 내 인형의 외피를 데우면, 나는 정말로 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 나...
바다. 물로 뒤덮인 깊고 낮은 대지는 언제나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가장 위대한 발견, 가장 아름다운 보석, 가장 맑은 연안, 가장 깊은 산, 가장 높은 구덩이, 가장 위험한 재난. 때문에 바다 위를 떠돌 때면 사람으로 가득 찬 도시를 거니는 것보다도 작아지기 마련이다. 허나 이따금 그 무력함, 막막함, 오로지 자연의 손길에 따른 삶을 모두 받아들이...
달의 시간은 마법적이고 은밀하며 묘한 암시를 품고 있다. 괜히 일부 전승 속의 연금술사들이 달빛을 받으며 연단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한 마력은 가장 강력한 마술인 언어에도 깊이 스며 있어, 단어 하나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인사를 말함이다. 실내화 바닥이 돌계단에 스치며 부드러운 마찰음을 냈다. 달마저 저물어가는 ...
깊은 뜻을 가진 길고 지난한 단어를 나열해 말을 꾸며내는 것에는 전혀 재주가 없었다. 열 길 물 속은 망설임 없이 들어가도 한 길 사람 속을 알기는 여간 망설여지는 게 아니었다. 언행을 파헤쳐 앞뒤를 연결짓고 염두에 두는 일은 과하게만 느껴졌고, 언행의 겉면만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은 편리했다. 라르고의 세상은 언제나 가장 바깥의 외피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상은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돌아간다. 얼룩진 태피스트리를 접어 기워낸 것처럼, 잘못 그어버린 한 귀퉁이가 잘린 채로. 기계적으로 손을 놀려 ‘일’을 처리하던 코르비니아노는 문득 질문했다. 내가 기대하시는 그러한 사람이 맞을까? 자기혐오를 갓 시작한 사람이 선택할 법한 최악의 질문이었다. 메이드맨은 실상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부품이자 도구로 기능하며 주...
정신없이 살다 보니 어느덧 금요일이었다. 오픈 준비를 하던 직원들이 차례대로 한숨을 푹푹 내쉬곤 마저 진열에 열중했다. 근심의 연유는 다름아닌 그들의 사장 되는 이였다. 지정한 책만 잘 들여오면 서점 운영에조차 크게 터치하지 않던 무던한 고용주였건만, 언제부턴가 주기적으로 나와 카운터를 지키고 서 있었다. 덕분에 눈치 보는 직원들만 죽을 맛이었다. 넉살 좋...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한데 모여 경건하게 무릎 꿇은 이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조렸다. 열두 신에게의 번제와 유일신에게의 찬송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사이에 섞여 앉은 아레스는 여느 때와 같이 웃으며 프로메테우스를 불렀다. 정작 제 곁에 덩달아 꿇어 앉은 이의 속이 진창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메테우...
가출했다. 살림살이의 태반을 두고 나온 주제에 거래를 위해 떠나보내야 할 골동품은 바리바리 챙겨온 세베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내리깐 시야에 군데군데 쪼개지고 패인 나무 바닥이 보였다. 오랫동안 숲지기의 거처로 사용하다, 그나마도 길이 닦이며 필요가 사라져 텅 비어버린 오두막을 어찌어찌 얻어 막 짐을 푼 참이었다. 짙푸른 털을 모두 털어내지 못한 옷가지 ...
질문에 질문이 돌아올 줄이야! 짧은 문장이건만 사고회로를 거쳐 인식되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했으면 한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결혼할 사이 같냐는 건 무슨 말인가? 이름은 제대로 답해 줬으면서! 과연 마지막까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는 게 그다웠다. 그 만만찮음은 둘째치고, '결혼할 사이'라는 것이 당최 무슨 뜻인가? 결혼에는 수많은 형태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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