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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세차게 몸을 뒤흔드는 통에 놀라 일어나니 넋이 나간 듯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견연과 눈이 마주쳤다. 취생몽사가 완전히 깨지 않은 상태인 거로 보아 가만히 지켜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한편 자서는 스스럼없이 잠들었다는 것에 매우 놀란 상태였다. 심한 불면증에 시달려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는데 아무렇지 않게 잠...
먼 옛날 하늘의 신들이 세상을 두루 살피기 위해 땅으로 내려와 인간들에게 신의 지혜와 은총을 베풀며 정성껏 보살폈다. 어둠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그들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자 더 이상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판단한 신들은 만년설에 터를 잡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 후손조차 대대손손 만년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들의 모습이 평범한 인간과...
기나긴 어둠을 뚫고 나와 명계를 벗어난 그는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한발 한발 떼어낼 때마다 감정의 물결이 요동(搖動)쳤다. 객행을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많이 걸 잃어버렸다. 기억을 잃고 구소 또한 잃었다. 어찌 용서할 수 있을까. 애타게 자신을 붙잡던 이의 손길을 뿌리쳐낼 만큼 밉고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애처로...
무거웠던 눈꺼풀이 서서히 떠지게 된 것은 바깥에서 갑작스레 불규칙하게 뒤섞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때문이었다. 몸을 돌려 옆자리를 힐끗 본 자서는 흔적조차 없는 객행의 행방이 묘연한 건 둘째 치고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곳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는 소란스러움에 영문을 알 수 없어 몸을 일으켜 천천히 장지문 앞으로 다가섰다. 또 악귀가 나타난 건가 싶어 문틈...
좋았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어영부영 술자리를 끝낸 그들은 숨막히게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객행은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여느 때보다 깊은 상흔(傷痕)에 시무룩해진 상태였고 자서도 미안한 마음에 말을 얹질 못했다.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서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여태껏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쳤을 뿐...
하얀 포말을 드러내며 한없이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바라보다 수평선 너머 느릿하게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다 세차게 울부짖는 차디찬 물결 속에 시선을 내리눌렀다. 탄식 섞인 숨소리가 매섭게 다그치는 바람에 섞여 소리 없이 흩어졌다. 차가운 난간을 그러쥐어 붙잡은 두 손이 얇게 떨렸다. 한 발만 내디디면 끝나는 세계였다. 허공에 띄워진 다리를 살살 흔들며 이제...
매끈하고 기다란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자, 움푹 팬 굴곡진 눈매는 좀처럼 떠질 기미가 없었다. 일렁인 불빛 아래 촘촘하게 매어진 짙은 속눈썹 그림자가 어룽졌다. 난각 안은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고 자색 옷의 소녀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을 여지없이 지켜보는 자서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했...
“수일이 걸릴지도 모르니 혹여 변고가 생기거든 기관작을 띄우거라.” “꼭 직접 나가셔야 합니까? 다른 사형들에게 명하시면 될 일이 아닙니까!” “그 약초는 손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라 직접 나가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불안해하지 말고 사제들에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야지.” “하... 하지만,” “구소야..” “..알겠습니다.” 이제 막 약관의 나...
어둠 속에 잠겨 기척 없이 밤거리를 내달리는 검은 세단은 흡사 망령의 기사 같았다. 도로 위는 한산했고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어 건물 사이사이를 비춰냈다. 단붕거는 조수석에 앉아 룸미러를 힐끔거리며 뒷좌석에 앉은 이에게 집중했다. 가죽 시트 안쪽으로 몸을 깊게 묻고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지키는 남자는 숨소리조차 함부로 내지 않았다. 차 안은 무겁게 내려앉은 ...
자서는 무수하게 펼쳐지는 흑백 글자들의 현란한 춤사위를 지켜보며 무심히 팔짱을 끼고 가만히 위녕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모든 루트를 통해 방법을 찾았지만, 난공불락의 난제는 생각처럼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몇 번의 시도에도 여지없이 불연속 반응이 지속되자 시스템 오작동이 아닌 프로그램 오류 인터럽트라는 결론에 다 닿았다. 무겁게 내려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쳐 사랑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생각만큼 쉬웠다. 다시 만난다면, 만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을 기약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죽이리라. 어둠 속에서 수천 번, 수만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견뎌냈다. 그렇게 참고 기다렸던 나날들은 무척이나 길었고 지루했다. 하지만 온객행은 참고 인내했다. 나락으로 떨어져 바닥의...
칠흑같이 어두운 장막 속 붉은 불길만이 주변을 감싸며 빛을 냈다. 그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이가 보였다.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에 떠는 것인지 깊은 심연의 바닥 속으로 얼굴을 떨군 채 주저앉아 표정조차 보이지 않았다.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듯 품 안 가득 소중히 감싸 안고 있는 무언가를 가까이 보고자 다가가자 희번덕한 눈을 치켜뜨고 저를 노려보았...
자서가 천장 로비로 들어서자 분주하게 업무에 열중하던 모두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건물 내 모든 이의 시선을 받아내며 한영의 마중을 받은 그는 간략한 지시를 내리고 숙소로 향했다. 항상 깔끔하고 도도하신 천장의 대표이자 얼굴마담께서 엉망진창이 되어 돌아왔단 건 이번 업무가 쉽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자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
객행이 동네방네 소란스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는 터라 잠시 둔해져 있던 것들이 하나둘 움직이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온 객행과 자서를 발견하곤 일제히 방향을 틀어 몰려들었다. 앞서가던 객행을 붙잡아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고 검을 들어 다가오는 것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본 그것들은 날카로운 손톱과 푸르딩딩한 피부색만 제외하면 얼핏 인간과 닮아있었다. 하지...
회오리 속으로 발을 내딛던 자서는 주춤거리며 뒤로 한발 물러났다. 이걸 뚫고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기에 좀 더 현명하고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는 회오리 주변을 돌며 빈틈을 찾았으나 광속으로 회전하는 물체에 틈이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어쩌나. 이걸 어떻게 뚫고 들어가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찰나 객행의 머리 위에 여백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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