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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르는 날 줄 모르는 새처럼 어느새 내린 비에 젖은 날개를 접고서, 숲길을 걸었다. 서쪽 숲은 잘못 들어섰다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악명대로 그 모르를 몇 날, 몇 밤 음침한 숲에 가둬놓았다. 육체가 있는 사람과 다른 모르는 굶주리진 않았지만, 마음이 굶주려서 제정신을 잃어갔다.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3일간의 소나기 아래서, 그 모르는 지친 ...
한순간, 요미에의 뺨이 굳었다. “듣고 보니,” 요미에가 한 발을 내디뎌, 창고로 가는 길목을 몸으로 가렸다. “집이 어수선하지? 혼자 오래 살아서, 누구 눈치를 볼 필요 없었어. 네가 있으니 앞으로 신경 쓸게.” “편하게 대하세요. 저 혼자 착각하는 건가 싶어서 물어봤어요.” 요미에가 찻잔을 싱크대에 두자, 뒤따라 일어난 로라가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요...
택시에서 깜빡 잠들었던 로라는 요미에의 집에 도착해서야 눈을 떴다. 소파에 앉아, 자세를 바꾸는 로라의 귓가에 요미에의 발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요?” 부엌에서 돌아오는 요미에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칠흑 같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미안해요. 어제부터 정전이라. 이 동네는 전기가 잘 나가요.” 요미에는 성냥갑을 들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란체스는 빈 잔을 들며, 로라의 시선을 피했다. “추락한 천사 하나가 이토록 세상을 망칠 줄 누가,” 란체스는 잔에 입술을 대고서야, 잔이 비었음을 알았다. 란체스는 두 손을 포개어, 책상에 내려놓았다. “네 덕분에 이 수도원에 당분간 새벽이 오지 않겠어.” 란체스는 수화기를 들었다. “더는 우리와 같은 배를 타지 못 하겠구나.” 다이얼을 돌리기 전에 란체...
로라는 졸음이 쏟아졌다. “바람 소리가 들려. 창문을 열었지?” “그렇다 한들, 그게 중요해?” “신경 쓰여.” 로라는 무심코 모르의 은반지를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모르가 속삭였다. “내 이름을 알고 싶어?” 모르의 이름은 반지 안쪽에 적혀 있다. “하지만 오늘은 쾌락만 얻어 가.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너는 내 얼굴을 볼 수 있어. 나 역시 네 얼굴...
“로라 그리스.” 그 이름을 부르는 란체스의 목소리는 고요하고 위엄 있었다. 란체스는 짧게 자른 회색 머리까지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가로등 불빛이 새어드는 창 쪽으로 돌아섰다. 곧바로 란체스는 커튼을 쳐서 빛을 차단한 후, 책상 뒤에 앉으며 스탠드 불을 켰다. 그런데도 빛이 흐릿하여, 고집스러운 란체스의 입술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란체스는 어둠에...
파란 바탕에 초승달이 그려진 동화책 표지를 넘기니, 짧은 글귀가 나왔다. 〔신의 눈동자는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신의 눈이며, 그 말은 우리가 개별적이면서 하나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라. 당신을 통해 나는 우리 세계를 증명해 보이고, 당신도 우리를 통...
벤더의 눈동자는 미래를 아는 예언자의 눈처럼 신비롭고 고요했다. 그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키리에가 차차 눈 크기를 키우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옆에서 가온은 난간에 머리를 찧으며 흐느꼈다.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데, 모두 다 내 적인데, 내가 왜 이 자식들 앞에서 죄를 고백해야 해? 잔인해.” 서럽게 우는 가온의 목소리가 들리는 중에 돌연 벤더의...
바인칸을 이끄는 간부들은 그들의 고백이 거짓이라 주장했지만, 그럴수록 바인칸 내부의 분열이 극심해졌다. 이 문제는 로데오에 있는 바인칸 사람들을 넘어, 스에란의 고백을 들은 오트렌드 쪽 바인칸 사람들도 괜스레 들썩이며, 가온에 관해 들었던 소문들을 털어놓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바인칸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때가 되면 태양...
므피아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살인자, 살인자야!” 므피아는 복도로 나가, 모두를 불렀다. 가온이 창을 곁눈질하며, 설익은 웃음을 지었다. 이 공연장을 찾아오는 다른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또 속았어.” 가온은 셔츠 가슴 부분을 움켜쥐고, 괴성을 질렀다.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가온은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단단한 뿔을 마구 꺾었다...
과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일순간, 가온은 자신이 키리에의 손을 가볍게 쳤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연달아서 키리에가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가온은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을 못 하는 인형처럼. 한참이 지나, 가온은 무릎 아래로 손을 내밀어, 키리에의 육체가 자기 손톱에 얼마나 뜯겨나갔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겨우 단단한 게 손에 잡혔을 때, ...
뒤틀린 살덩이들은 가온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고통을 주장해댔다. 가온은 그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때문에 빗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돌연 쨍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와, 가온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까마귀 한 마리가 가온의 뿔에 내려앉았다. 가온은 까마귀에게 말했다. “나를 죽여줘.” 까마귀가 가온의 뿔에서 마른 나...
1월 30일, 가온은 오전 일정을 예고 없이 전부 취소했다. 발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가온은 이반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온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이반은 키리에의 공연장으로 차를 움직이며, 가온에게 말을 걸었다. “그저께 공연을 보러 갔다고 했지? 키리에도 만났어?” “...
보이는 풍경도 풍경이었지만, 바람도 선선하고, 빛도 적당히 환했다. 그렇지만 키리에는 방금 알아챈 사실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다. 크리스가 왜 그러냐고 묻자, 키리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금방 키리에의 머리가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크리스가 자세히 보니, 높이 올린 키리에의 머리가 얼기설기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크리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
가온이 이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짜 죽이려 했어?” “응. 그런데 키리에가 긴 머리를 풀어 헤쳤을 때, 인간의 머리에 있어선 안 될 뿔이 보이더니, 곧 괴상한 환영이 두 눈을 사로잡았어.” 이반이 푹신한 시트를 짚었다. “환영이 너무 끔찍해서 원래 계획을 실행할 겨를도 없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 당연히 키리에한테 뭘 물을 정신도 없었고.”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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