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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온이 순록에게 등을 보였을 때, 순록이 눈알을 휙 가온 쪽으로 굴렸다. "어디 가세요?" 부리나케 가온이 돌아서자, 순록이 낄낄 웃었다. "어디로도 못 가요. 저는 영원히 당신과 함께 당신 안에서 살아갈 겁니다. 다만 우리가 대화할 일은 앞으로 없겠군요."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지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대화가 필요 없을 만큼 우리...
크리스는 조수석 수납 칸에서 메모지와 볼펜을 꺼냈다. "잠깐은. 하지만 가까워도 편한 사이는 아니야. 편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거지. 밤에는 무얼 하든 괜찮다고 규칙으로 정해져 있지만, 오늘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는 걸 봤는데, 태연하게 어제처럼 그 사람을 믿는 건 어려워. 그래서 밤거리에선 노력이 필요해. 사람을 도저히 못 믿겠지만, 판을 깨...
커피를 맛본 크리스가 눈 크기를 키웠다. "설탕은 안 넣었어?" "응. 네가 이런 시커먼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어." "언제 나 몰래 어디서 마신 적 있어?"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키리에가 거실 탁자를 가리켰다. "맞다. 그전에." 탁자에는 잡지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 잡지는 어...
크리스가 동문서답했다. "사실 이별보다 사랑한다는 말이 1년 차 아이돌에게 어울려. 그렇지만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네가 평범하지 않길 바라니까. 그리고 어제 인터뷰를 생각하면." 크리스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키리에도 동문서답했다. "토미가 운전을 잘했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어." 키리에는 맨 위에 있는 잡지를 들어,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그러다가...
가온이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키리에한테서 떨어지자, 숨을 죽이고 있던 감독이 장면을 끊었다. 이 장면을 끝으로 키리에는 드라마 촬영을 모두 마쳤다. 앞서 촬영을 끝냈던 이반이 오늘 꽃다발을 들고 와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가온에게 무미건조했던 키리에가 연보라색 수국 꽃다발을 향해 쪼르르 내려갔다. 가온은 멀리서 이반에게 말을 거는 키리에의 입술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여유로운 이반에게 감탄하다가, 서둘러 되물었다. "사랑은 허상이라고?" "사랑은 그냥 사랑이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완벽히 표현할 수도 없는데, 왜 자꾸 표현하려는 거지? 그래봤자, 실재하는 감정보다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표현할 수밖에 없는데. 왜곡된 로망과 달리 현실은 머릿돌 없는 궁전이거나 파도를 눈앞에 둔 모래성이야...
가온은 촬영 전에 화장실에서 점심때 먹은 음식물을 토했다. 화장실 칸에서 나와, 세면대에 선 가온의 얼굴은 창백해서, 예전에 피를 토하던 키리에의 낯빛과 비슷했다. 반면, 키리에는 더 피를 토하지 않아서, 지금은 얼굴에 복숭앗빛 생기가 돌았다. 가온은 찬물로 세수하고 나서, 촬영장을 나왔다. 다음에 촬영할 장면은 이반과 가온,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가온이 실눈을 떴다. 두 눈알이 빠진 사람이 가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이는 한참 가온의 코끝과 뺨, 눈가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마지막에 비로소 가온의 입술 위치를 가늠한 그이는 가온 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온몸에 번진 열기를 느끼며, 가온의 호흡도 이상해졌지만, 아무런 쾌락도 없었기에 가온은 맨정신으로 하반신을 파고드는 남자의 하체를 느낄 수 있었...
하지만 사실 가온은 자신도 모르게 그 무대에 빠져들어, 손뼉을 칠 뻔했다. 키리에의 무대를 본 가온을 포함한, 그 자리에 있는 광대들은 왕궁 시대 향수에 잠겨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나 광대들은 세상이 그들 손바닥에 있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했기에. 그러나 얼른 가온은 자신을 다잡았다. "네가 돌아올 자리는 없어." 가온이 무대를 등지고 섰다. <...
바마 엘리엘은 가온에게 붙잡혀, 대기실 앞에 서 있었다. "4월 32일, 그게 왜?" 바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주황색 머리를 연거푸 금색으로 물들인 탓에 머리카락이 완벽한 주황도 아니고, 완벽한 금색도 아니었다. 오묘한 색상은 요정 같은 여성, 바마와 잘 어울려서 화사했지만, 바마가 입은 검은 옷은 은퇴를 앞둔 그 자신의 심정을 빗댄 것처럼 투박했다. "그...
크리스가 일일이 고개를 돌려가며 반응했다. "네가?" "아니. 그쪽에서 먼저 영화 얘기를 꺼냈어. 그래서 내가 음악만 맡겠다고 했고. 내 목표는 내가 없어진 후에도 야간성 사람들이 돈을 벌게 하는 거야. 나만 의지해선 오래가지 못해." "영화 얘기만 한 거야?" "맞아, 같이 일해주는 대가로 음악 방송에 나오게 해주겠대. 허풍을 치나 했더니," 키리에는 이...
크리스가 키리에의 오른 다리를 겅중 뛰어넘으며, 이반에게 달려갔다. "네가 여기 왜 있어?" 크리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험악해서, 담력 있는 이반조차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눈썹을 실룩거렸다. 키리에가 흥분한 크리스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이반 앞에 섰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어?" "네가 바인칸에서 쫓겨난 뒤, 야간성과 합류한 것까지." 키리에가 한...
그래도 가온은 손에 잡히지 않는 로데오를 억지로 머릿속에 그리며,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렸다. 너무 많은 사람을 잡아먹다 보니 어느새 식사하는 일이 고역이 된 가온은 기어코 어제 고열을 동반한 구토 증세를 일으켰다. 가온이 열이 오른 숨을 뱉었다. "내면에서 먹은 게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미친 거지?" 가온은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키리에가 나 몰래 무슨 짓...
크리스가 다 마신 캔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들키면." 토미가 크리스의 입을 막았다. "조심해. 로컬메유는 한 가지에 몰두하는 도깨비의 사냥꾼 기질을 타고나서, 한 번 품은 감정을 버리지 못해.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큼 로컬메유를 불행하게 하고, 또 위험하게 하는 것도 없어." 토미가 크리스의 옆머리에 손바닥을 댔다. "하지만 다행히 아직 너는 누구도 사랑하...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던 10월 13일, 집이 없던 17살 크리스는 지붕이 있는 곳을 찾아, 밤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크리스는 부모에게 버려진 미성년자였다. 그런 크리스를 내버려 둘 리 없는 이 도시의 불량배 무리가 크리스를 사람이 없는 공터로 끌고 갔다. 그 무리는 챙이 달린 모자를 쓴 크리스를 음침하다, 재수 없다고 평하며 시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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