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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침상에는 망령이 살고 있다. 질 나쁜 밤자리 괴담같지만 말하는 본인이 당사자라는 점에서 더욱 지독한 이야기다. 에델가르트는 조금도 이 사태에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 기억조차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외에는 그 누구도 그녀의 베개 옆을 지킨 적이 없다. 이제 와서 단순히 온기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따로 초대를 받은 적도 없는...
가장 특별한 소식이 화살처럼 날아들어온 날은, 우습게도 근래 그녀의 일정 중 가장 평범함을 자랑했던 하루였다. 햇빛의 그림자가 서서히 늘어지는 늦은 오후였고, 에델가르트는 여느 때처럼 검은 깃펜을 바삐 놀리고 있었다. 서명을 찍어도 찍어도 줄어들지 않는 서류에 지쳐 무언가 환기 될 만한 달달한 간식거리라도 입에 넣을까 고민하던 중, 건너편 복도에서부터 탕,...
그 날은 유독 눈이 많이 왔다. 퍼거스의 겨울은 본래 혹독하다지만 정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오후가 될때까지 거세지기만 하지 도통 멈추질 않아 마차가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눈살이 겨우 잦아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이 어둑어둑해진 터라 아룬델 공은 저택에서 하루를 지낸후 다음 날 아침 떠나는 편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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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가르그 마크의 가장 깊은 지하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태양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쩌다 입구 근처에 다다라도 어둠 속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악취에 질색하며 자리를 황급히 피하곤 했다. 조금 용기가 있는 자들은,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며 낡은 돌계단을 넘어 내려오기도 했다. 아주 드문 일은 아니다. 어쨌든 사관학교 부지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
이건 너무해. 아니, 불공평하다. 처음부터 나에겐 선택권 따윈 주어지지 않았고 너는 언제나 절대적인 승자로 군림할 수 있었지. 언제부터, 언제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게 된 걸까. 분명 처음 만났을 때 너는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에, 그런 주제에 외로움을 잘 타서 도저히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여자애에 불과했는데. 아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대, 너는 그 당...
꿈 속에서의 휴베르트는 웃고 있었다. -저는 테프를 주로 선호합니다만, 가끔씩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요. 그리 읊조리던 연녹색 눈동자는 햇살을 머금고 막 피어나는 새싹의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남자와 평화는 기름과 물처럼 어우러질 수 없다고 과거의 자신은 말했었다. 그러나 홍차를 홀짝이며, 뜨뜻한 온기에 한껏 풀어진 고양이마냥 느긋한 남자는 의외로 분위기...
페르디난트가 앙바르를 방문한 것은 몇 년 만이었다. 일부러 피해왔던 장소를 왜 이제 와서 찾는 것인지는 그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궁성은 텅 비어있었다. 벽과 기둥을 칠한 금은 사람들이 벗겨낸지 오래였고 화려한 화병과 명화도 도난당해 먼지만이 굴러다녔다. 흐레스벨그의 문장이 새겨진 벨벳 커튼은 무자비하게 뜯겨나가 오로지 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어린 ...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의 아버지는 실로 다정한 이였다. 디미트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람베르는 매일같이 유모의 곁에서 밤을 새가며 자신을 직접 재웠다고 한다. 아기는 몹시나 섬세한 존재다. 지금이야 2층에서 뛰어내려도 끄떡없는 디미트리지만 당시 블레다드의 문장을 지닌 아버지에겐 아들을 안아올리는 것조차 무척이나...
가르그마크의 학기도 벌써 절반이 흘러 어느 덧 마지막을 고하는 가을의 흔적이 발치에 나뒹군다. 하나씩 저물어가는 잎사귀들이 얼마 남지 않은 학창시절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일까, 선연한 붉은 빛 자체는 수도 없이 보았던 흔하디 흔한 풍경인데도 조금 처량하다 여겨졌다. 물론 흘러가는 시간이 마냥 이별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핀전을 계기로 부쩍 가까워진 이...
죽인다. 죽여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 울부짖으며 비에 젖은 진창을 뛰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창을 휘둘러 심장을 베고 한 손으로 적의 목을 비틀어 꺾으면서도 시선은 한 사람만을 향하던 세월이었다. 오로지 너를 향한 증오로만 살아왔는데 내 전생은 그야말로 패배로만 가득차 결국 나는 너를 죽이는 데에도, 사랑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복수하고픈 열망. 그럼에...
01. -네가 나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어. 피아나, 나의 어머니.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강인한 여인은 어린 칼리드의 검은 고수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끔씩 한숨에 가까운 말을 내뱉곤 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행복하지 않으세요? 칼리드는 그럴 때마다 항상 어리석게도 물어보고야 말았다. 팔미라의 정비, 그러나 유일한 왕비가 아닌 여인이 무슨 마음으...
그는, 남자가 부러웠다. 시작부터 이 세상에 스스로의 자리를 곧게 뿌리내린 듯한 자였다. 무엇에도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는. 그런 주군의 곁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온 몸으로 말하는 듯한 남자. 휴베르트를 마주할 때마다 페르디난트는 아직도 갈림길 사이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 제가 참으로 한심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 같았다. 황제의 발치에는 궁내...
진작에 치유술을 익혀야 했는데. 아니, 상처를 치료할 궁리를 하기 전에 적의 머릿수를 하나라도 더 줄여놨어야 했다. 어머니께선 말씀하셨지.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가 폭풍의 눈 안에 들어선 거라고.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언제나 최후의 대비수단을 아껴놓으라고. 추격을 따돌린 줄 알고 마지막 남은 상처약을 들이킨 건 뼈 아픈 실수였다....
'디미트리. 네 금발이 부러워.' 어릴 적, 에델가르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엘의 이야기에 따르면, 왕국으로 떠나오기 전 그녀의 누이들은 머리카락을 땋고 묶어 온갖 특이한 모양으로 단장시키는 것에 무척이나 능했다고 한다. 비록 언니들의 기상천외한 손재주를 엘은 도저히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그 흉내를 내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마음이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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