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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신평은 숨기는 법을 잘 몰랐다. 물이 바위를 만난다고 흐르기를 그만두는가. 천성이 약지가 못하여 그렇다. 뻗대며 흘러야만 하는 물인 신평은 언제나 거짓에 익숙해지는 것보다는 진실을 마주 잡고 떳떳이 목을 내어주는 편을 택할 것이다. 하여 개화 이후 여즉 마음을 졸여오고 있지 않은가. 하루도 악몽을 꾸지 않은 날이 없다. 신평은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
一 어미가 다니던 신당은 낙화산 깊숙이 터를 잡고 있었다. 혜빈이 처음 입궁을 할 때 어미가 안겨준 부적도 이 신당의 무당이 써준 것이다. 평인에 가까운 몸이기는 하나 태생은 양인이지 않던가. 부디 들키지 말라며 누런 종이를 움켜 쥐어주던 손은 아주 젊은 나이였음에도 주름이 많았다. 하여 혜빈은 그 날 마지막으로 본 어미의 눈을 잊지 못한다. 곁에 머무르다...
1 상하이의 랜드마크가 한 데 모인 루짜주이 금융지구를 배경으로, 황푸강을 따라 내려가던 페리 한 척이 연신 셔터를 터트린다.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배의 후미로 몰려들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커플이 동행에게 뭐라뭐라 외치며 사진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졸지에 부모님 뻘 인파 사이에 뒤섞이게 된 재현은 고갤 푹 숙이며 난간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배의 ...
* 세자 신평 충위 월산 명윤 희안 연환
1 새벽 여섯 시. 인천 앞 바다에는 짙은 안개가 껴있다. 영종도로 이어지는 대교 위는 한산했다. 갈매기 몇 마리만이 낮은 고도를 유지하며 철근 사이를 날고 있었다. 송도가 저기 어디 즈음이었나. 재현은 유리창을 문지르던 손으로 턱을 괴었다. 운전대를 잡은 영대와 룸미러로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계속 뒷좌석 눈치를 보는 게 거슬리던 참이었다. 원래 선빵 ...
1 캠퍼스 한 복판에서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를 곱씹어볼 줄은 몰랐다. 우리나라는 사계절 국가가 아니었던가. 일년 열 두 달을 네 등분해서 나누면 팔월까지는 여름, 구월부터는 가을이어야 맞다. 안 그래도 뭣 하나 똑바로 세운 것 없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스물 셋. 자연의 섭리조차 애매모호해서 매일매일 옷 차림을 고민하게 만든다. 개강을 맞은 캠퍼스는 ...
1 자리를 튼지 일 년이 조금 넘은 오피스텔은 회사에선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거리, 주연이의 인테리어 사무소에선 버스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다. 한강이 가깝고 도심치고 흔치 않은 큰 공원도 있는 입지에다, 철물점과 공장들이 떠나간 자리에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 편집샵까지 생겨나면서 갈수록 사람이 몰리고 있는 동네였다. 그런 동네마다 꼭 하나씩 있는 게 ...
1 서른이 되기 전에 꼭 가봐야 한다고 다짐했던 유럽 여행은 군대와 취업 준비, 취업 후엔 다시 사회 초년생으로서 충분한 적응기가 필요하다는 핑계로, 꼭 돈이 있으면 시간은 없다는 핑계로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뒤돌아보게 되었다. 케케 묵은 기억들을 뒤적이면서, 새삼 우리가 그때 이런 다짐도 했었구나라고. 별 관심도 없던 세계테마기행이나 걸어서 세계속으로 같...
점. 1 지진이 빈번한 열도의 살아 숨쉬는 땅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승강장. 그 안을 불의 고리처럼 순환하는 노선 두 개. 히비야 선과 오에도 선이 만나는 롯폰기 역사 위로 칠월의 해가 저문다. 임대 아파트에서 도보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롯폰기 역은 퇴근 시간이 임박하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인도의 연석을 두드리는 날카로운 구두소...
1 백 여명을 수용 가능한 강의실에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ORACLE. 산업화의 시작을 알리는 흑백 화면 위로 위대한 알파벳 여섯 개가 적힌다. 글자 뒤에는 빽빽하게 들어선 공장들이 있다. 공장 굴뚝 위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나르는 아이들.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두 배속으로 움직이는 노동자들. 회전하는 톱니. 분주하게 너트를...
1 복도식 이층 건물로 설계된 선셋 모텔은 대륙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의 저가 숙박업소다. 고속도로 방면으로 세워진 간판과, 장기 투숙객을 위한 코인 세탁실, 복도에 구비된 자판기들, 곰팡이가 슬기 직전의 커튼과 청결치 못한 침구, 불친절한 주인, 방음 처리 따윈 되지 않는 낡은 벽, 어디선가 달려와 알 수 없는 목적으로 머물다 가는 차량들의 눅눅한 배...
1 인터넷에선 지금도 수 천 만 개의 웹사이트들이 몇 백 개씩 사라지고, 탄생하고, 잊혀지고 있다. 그중 <이십 일 세기 심령 연구회>라는 이름의 웹사이트는 탄생 초기 몇몇 괴짜들이나 미스터리 동호회원들, 호사가들의 반짝하는 관심을 끌었으나 저조한 업로드와 지나치게 '정상적인' 게시물들로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전혀 자...
1 캐비넷을 여는 손이 성치 않다. 무의식 중에 오른손을 쓰던 남자는 작게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울컥, 하고 피가 한 차례 붕대를 적시더니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뿌리를 긁고 올라왔다. 남자는 시선을 내리깔고 잘게 떠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제각각으로 뒤틀려 있는 손가락 뼈들이 보였다. ...그러게. 아작나기 전에 치료부터 받으라니까요. 나도 이렇게 오래갈...
一 목이 꺾인 수풀 위로 바람이 무게를 싣는다. 유소는 승복 소매를 걷고 무너진 수풀을 훑어본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풀들이 짓밟혀 있다. 한데 둥글게 뭉친 모양을 보아하니 꼭 응어리 같다. 산의 응어리. 늑골 안에서부터 뭉근하게 스며 나오는 산짐승의 응어리 말이다. 손바닥을 펼치니 엄지와 새끼가 그 둘레를 다 채우지 못한다. 오기가 생겨 손가락을 팽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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