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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서 살다 보면 배신과 암약과 기만은 흔한 일이다. 어제까지는 피를 나눈 동지라 할지라도 날이 바뀌어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것은 너무도 흔한 일이라 굳이 사례를 찾지 않아도 줄줄이 나온다. 조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력이 넘치는, 그야말로 조직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나오는 어수룩...
세상엔 이렇게 죽는 사람이 많았구나. 누가 들으면 새삼스럽다는 소리를 할 거 같은 생각을 하며 강형호는 인터넷 창을 노려봤다. 일할 때만 끼는, 안경원 사장님이 모니터의 블루 라이트를 차단해줘서 눈의 피로감을 줄여준댔나 어쨌댔나 입을 털어 비싸게 주고 산 렌즈 너머로 보이는 화면은 수많은 글자가 떠 있었다. ‘살인’이라는 단어에 굵게 표시된 것이 흉흉하기 ...
고양이는 변덕스럽다고 하던데, 하고 내뱉는 말에 조민규는 대답 대신 눈만 치켜올렸다. 안경 프레임 너머로 보이는 남자는 누가 봐도 참, 경박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물에 빠지면 주둥이만 둥둥 뜰 것처럼 생겼고 실제로 이날 이때까지 주둥이로만 먹고살았다며 우스갯소리처럼, 본심처럼 내뱉던 남자. 서류를 내려다본 민규는 그래서? 하고 되물었다. “그런 말 있잖아...
귀신은요, 페브리즈 뿌리면 도망간대요. 장바구니를 들고 스쳐 지나가다가 보인 페브리즈에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어제 일이 생각난 탓이다.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남자. 아마 형호보다 조금 연하거나 많아 봐야 또래. 시무룩한 얼굴이 인상적이던, 한이 서린 귀신이라거나 악귀라기엔 너무도 처연해 보이던 얼굴의 그 귀신. 근데 귀신은 귀신. 유령. 고스트. 죽은 사람...
에라이 씨발. 구겨진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며 강형호는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에라이 씨발. 또 한 번 중얼, 입안으로 욕지기를 뇌까리며 낯설기 짝이 없는 방안을 둘러본다. 에라이 씨발, 이번만 해도 세 번째, 또 한 번 웅얼거리며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건 알아도 욕이라도 안 하면 성질이 뻗쳐서 살 수가 있겠냐고, 그런 변명이나 좀 해본다. 인생에 굴...
불편한 자리에 쓸데없이 어둑어둑한 조명,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낮게 깔리는 배경음악은 저음을 지나치게 강조한 건지 둥둥거리는 베이스 소리 때문에 바닥이 울리는 착각까지 들었다. 어디 불편하신 거라도, 라는 말에 음악 소리가 좀 거슬리네요, 하고 대답하자 돌아온 대답이란 것은 “토끼라서 그런가?”였다. 토끼라서 소리에 예민하신 건가? 굉장히 섬세하게 신경을 쓰...
“몸은 괜찮냐.” “예.” “몸 잘 챙겨라, 네 밑에 딸린 식구들이 몇인데.” “…예, 그렇죠.” 금방이라도 사그라들어버릴 것처럼 대꾸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과거에서부터 새겨져 있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상흔. 어릴 적엔 나이를 먹으면 사라질 줄 알았다. 흔히들 말하는...
누군가의 시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딘가를,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경이든 어딘가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시선,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느라 정작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 같은 시선. 자기 머릿속을 보고 있는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마치...
* ▲요거 보고 충동적으로 쓴 것 손톱 사이에 시뻘건 물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큐티클에. 짧은 손톱 끝으로 큐티클을 긁으며 차가운 물로 손을 씻어내리다 양손에 물을 받아서 세수하려다 멈칫했다. 아, 맞다. 나 지금 메이크업. 새삼스럽게 생각나 도로 물을 세면대에 버리고 여기저기 튄 벌건 자국을 가만히 노려본다. 싸늘하리만치 하얀 조명은 눈이 다 아플 지경이...
* 파국 정신 차리려면 어쩔 수 없어, 하며 마시던 차는 늘 색이 진한 홍차였다. 붉은빛을 맑고 영롱하게 뽐내는 차가 아니라 마치 피나 흙이라도 섞은 것 같은 짙은 갈색의. 향이야 진한 향을 내지만 혀끝에 닿는 순간 혀가 저릿할 정도로 떫은맛이 입안을 싸고돌아 금방이라도 뱉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한 홍차를 제 형은 늘 뜨거운 물조차 타지 않고 홀짝홀짝 마시...
난 빨간색이 싫어. 이리 말해봐야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을 잘 안다. 관심조차 없겠지. 혹은 빈말처럼, 지나가는 말처럼 잘 어울리는데 왜요, 같은 소리나 하면서 숨기지 못할 쓴웃음을 입가에 걸고서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할 것이란 것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형호는 그 말을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애새끼도 아니고, 이제 와서 싫다, 좋다...
동네는 한동안 시끄러웠다고 한다. 하지만 두훈은 잘 모른다. 배두훈이 퇴원하고 돌아올 즈음엔 마을 사람들은 입을 맞춘 듯 어떻게든 사건을 묻어버리려 애를 쓰고 있었고, 외부인이 보이면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며 난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묻지 마라, 하며 뭘 물어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단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왜냐면 두훈이 가게 청소하고 있...
* 세상 못됐는데 내 고양이에게만 따수운 큰형을 쓰고 싶었던 무엇인가 내 동거인은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하기야, 잘 있던 나를 데리고 온 것부터가 멀쩡한 건 아닌 거 같다. 내 동거인은 이상하다. 내가 동거인을 처음 만난 건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그때의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뭐, 그것도 지금 생각하니 그런 거고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죽어간다는 ...
* 갑자기 쓰고 싶어졌던 근본 없고 근거 없고 날조 만재인 이야기 * 유혈묘사와 약간의 잔인함 예, 있습니다. 예, 뭘 그리 놀라십니까. 게 누구 있느냐, 하시기에 있다고 대답한 것뿐인데. 그러면 여기가 아무도 없는 빈 집인 줄 아셨소. 빈집이면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하셨소? 에이, 그럴 리가. 척 봐도 양반집 나으리 같으신데 설마 그러시려고. 예, ...
“몸은 괜찮습니까?” “수술도 잘 끝났고 경과도 좋다고 하니까 괜찮아요, 주치의 선생님한텐 많이 혼났지만.” “….” “….” 어색하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좁지도 않지만 넓지도 않은 1인실에 단둘, 하나는 침대에 앉아있고 하나는 의자에 앉은 채 참으로 어색하게 마주 보고 있는 둘은 딱히 할 말이 많은 사이는 아니었다. 한주원은 본래 사교성도 없고 싸가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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