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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줘기요. 여기 동대문 야구장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동대문 야구장이요?" 김건학은 저 얼굴을 안다. 정확히 말하면 저런 표정을 안다. 누군가를 놀려 먹을 수 있을 법한 건덕지를 잡았을 때 김건학 또래의 청년들은 모두 이런 표정을 지었다. 김건학이 이런 데에만 기민한 이유는 이런 표정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무안 당한 적이 손가락으로 꼽을 수도 없이...
매년 태평양 및 대서양 등지를 덮치는 태풍때문에 사람들은 땅 밑으로 들어가서 자신들만의 벙커를 만들었다. 2020년 현재 지상에 세워진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돈이 없거나, 지상에서 해야 하는 일을 가졌거나, 생활력은 없으나 전력은 끝없이 공급되어 27년째 가동 중인 안드로이드 뿐이었다. 창윤과 승준이 머무는 주공아파트에는 총 100세대 중 3세대에만 사람이...
때가 됐다고 느꼈다. 손대감한테는 해야할 것이 있으니 해야할 일이 끝난 후 돌아가겠단 말을 남겼다. 동주의 서신을 받은 손대감이 화를 낸 것은 당연하였으나, 하나 남은 아들마저 당신 손 밖으로 날 것이 두려웠는지, 저가 어린 시절 호되게 혼냈던 동주의 능력을 기억하고 있던 것인지, 결국 순순히 알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대감의 답신이 오기 전에 동주는 이미...
군인이라는 집단이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고 가라면 가는 곳인 걸 알고 시험까지 본 거지만, 이렇게까지 정치적인 집단일 줄은 들어오고서야 알았다. 그놈의 G7에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었는지 정부는 미군에 비벼서 무슨 로봇 같은 걸 하나 만들었다. 엄청난 걸 만들어 버렸으나 외부에는 극비여야 하고, 기동 실험은 해야하지만 책임은 직접 지기 싫으니 군 내부에 급조...
솔직히 창윤은 이미 영조의 마음이 떴단 걸 알고 있었다. 영조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영조가 창윤의 얼굴보다 자기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면서 더 많이 웃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영조도 꽤 기민한 타입인지라, 창윤이 눈치 챈 것을 눈치 챈 순간부터는 창윤과 만나는 빈도도 줄였다. 알아서 마음의 준비를 해 뒀기 때문에 큰 충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약 20년 전의 서울을 기억하고 떠올리는 방식에서, 효진이 정말 서울에 살긴 했었는지를 물어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거짓 없이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맞지만 그가 겪어야 했던 서울이 늘 달랐다. 그가 떠올리는 서울이 시기마다 다른 것은 그의 탓도 아니었고, 그냥 운명의 장난 같은 것. 효진이 기억하는 옛 서울엔 아직 전차가 사람들을 태우고 다녔고, 화...
혹시, 피리 좋아하십니까? 누구시오? 나는 피리는 이제 치가 떨립니다! 아닌데, 좋아하는데...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색의 고운 옷감으로 온 몸을 두르고, 갓을 쓰고, 하늘하늘한 부채까지 든 청년이 재영에게 말 걸었다. 재영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짐을 들어다 옮기고자 허리를 들었다가 앞에서 무슨 목소리가 들리기에 처음에는 보자기에 누가 들었나, 하며 귀를...
진짜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으면서 탈출하고 어떻게 살려 그랬어요? 건희는 자꾸 잡초만 뜯고 저를 보여주는 영조에게 익숙한 듯 타박을 주었다. 영조는 무안하다는 듯 허허, 웃으면서 저가 들고 있던 꽃을 자리에 도로 내려두었다. 영조는 화려한 도포를 걸치고 들고 있는 낫으로 나무 기둥 옆을 뒤적거렸다. 희야, 너는 이런걸 어떻게 아는 거야? 저는 의원이잖아...
예전에는 통아저씨 게임이라고 해서 요새 악어 이빨 눌러서 복불복으로 벌칙자 정하는 것처럼, 나무 통에 들어있는 아저씨 몸에 칼 꽂다가 어디 한 곳 잘못 찌르면 아저씨가 날아가는 복불복 게임이 있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땅 위에서 통아저씨 게임 잘못 했다가 날아 간 건 아저씨가 아니라 자전축이었다. 적확한 사유는 지금도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것...
마을에 씨가 마른 줄 알았던 놀이패가 다시 등장했다. 전 왕권이 약해지면서 도적떼같은 사람들에 습격을 받았던 그 시기 언저리에 등장했다. 하나 짚고 가자면, 놀이’패’라기엔 미묘했던 것이, 판을 만드는 이는 한 명이 전부였다. 예고없이 아무도 예상하니 못한 장소에 등장에 음악도 박자도 없이 맨 몸을 흔들다가 사라지곤 했다. 짧은 춤사위에 그가 하고 싶은 말...
수능 끝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했으면서 막상 끝나니까 니가 하고 싶은 일이면 니가 돈 벌어서 알아서 하시라는 모친의 깊은 뜻에 의거하여 지금 알바천국 어플 보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어딜 살고 있어도 지금 시기에 수능 끝난 고3을 누가 갖다가 뽑아 써요. 내가 점장이라도 안 그럴 듯. 학교에 하루종일 있으면서 돈 쓸 데도 없어가지고 그냥 저금통에다가 ...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쨌든 밖으로 털어 놓아야 사람 속이 풀리는 거잖아. 운동하러 가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그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라고 운동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면서 말하면 좀 이상하긴 한데, 사람이 돈은 벌고 먹고 살긴 해야 하기 때문에. 전공 잘 못 골라서 간 대학교 1학기도 못 버티고 자퇴한 후로는 뭘로 먹고 살...
전례 없는 장마와 소나기가 바톤터치 착실하게 해 가며 서울에 퍼붓고 있었고, 돈도 열정도 집도 없는 동아시아 청년 두 명이 코인 빨래방 앞에서 멍 때리고 있다. 남는 건 시간 뿐. 집 안에 아무리 널어 둬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빨랫감을 거의 울면서 끌고 와서는 코인 건조기에 처넣었다. 상주하는 사람이 없는 코인 어쩌구에 제대로 된 냉방 시설이 있을 리 없다...
대출 빡세게 받아서 어떻게든 자신의 공간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지만, 넓더라도 어쨌든 반지하인 셈이라 이것저것 고려해야할 점이 많았다. 그 중에서 창윤이 제일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갑작스럽게 객식구가 생겼다는 점인데. 주변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인터넷에서 본 이야기 조합해 보면 고양이는 연체동물이나 액체괴물 같은 느낌이던데, 창살이 그렇게 넓지도 않은 창문...
인생에 해외 경험이 있다는 것은, 기억 속에서 꺼내 볼 다채로운 기억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억 하나하나가 다 티백 같은 것이 되어 삶 전체에 우려진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나는 지금 카자흐스탄 요리가 존나 먹고 싶은데 맛집을 아직까지 못 찾아서 슬프기 때문에. 비록 스탄 붙는 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만 영어를 주로 사용했기에 러시아어는 거의 안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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