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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에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밖에 나왔을 때는 내가 제법 긴 시간 미쳐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바깥세상은 텅 비어있었다. 마치 그곳에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떠났고, 나는 지친 두 다리를 이끌고 내리쬐는 햇볕에 살갗이 타는 것을 걱정하며 걸어서 슬립으로 향했다. 정말로 인간은 스페이스라는 우주도 ...
넌 내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김태형은 절대 연애를 할 수 없다.왜? 걔는 전정국 거니까.누구 마음대로? 전정국 마음대로. 김태형은 한 번도 인정한 적 없지만, 어쨌거나 김태형은 자타공인 전정국 거다. 그걸 감히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랬다가는 앞으로 평생 두 다리 멀쩡하게 걸어 다닐 생각은 하면 안 되니까. 김태형이 전정국 거다, 그건 고1 때부터였던...
※ 트리거 주의 화난 표정과 달리 정국은 태형을 침대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도 모르는 사람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서 안아주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태형의 표정에 급히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품에 안겼다. 그러나 정국의 품이 조금 더 커서 태형이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태형은 그걸 못...
따스한 봄날은 비극으로 시작된다. 빅스의 말에 의하면 너는 다시 한번 자살하려다 자동으로 차단된 상태라고 했다. 나는 당장 너를 데려오라는 빅스의 말을 무시하고, 너를 데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너는 생명이 없어 죽지 않지만 그래도 산산이 부서지면 더이상 네가 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가장 높은 곳으로 가서, 너와 함께 지면으로 추락할 ...
나는 너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했다. 네 부재를 부정하고, 네 죽음을 부정하고, 네가 복사되었다는 사실이나 복사된 네가 너라는 사실을 전부 부정하다가, 급기야 너 없이 해가 뜨고, 심지어는 너 없이 해가 지기도 하고, 그렇게 너 없이도 매일이 지속된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래야만, 멀쩡히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널 잃고도 멀쩡히 살아가려고 했던 것 자...
어느새 겨울이었다. 나는 한동안 스페이스에서 지냈다. 현실이 거지 같아서 실제가 아닌 것으로 도망친 것이기도 했고, 어차피 현실에 네가 없으니 굳이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서이기도 했다. 복직할 날짜는 돌아오는데 나는 그냥 돌아버렸다. 영상을 올린 사람이 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이는 초인본주의(transhumanism)였고 나는 생명보수...
놓쳐버린 시간은 그 흐름을 뒤집을 방법이 없어 멍하니 너의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면 네가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많이 슬픈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너도 또 얼마나 슬플까. 하지만 나에게 너는 너의 가짜일 뿐이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네…….” “기죽지도 말고. 그냥 저리 꺼져버려.” “… 그치만 위로해주고 싶어요.” “야, ...
2040년 8월 10일. 전정국이 죽었다. 나는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로봇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도 고장이라도 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는데도 특이점은 아직 멀었는지 인간은 여전히 죽는다. 죽음은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을 끊임없이 유보하는 일을 해왔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충격적이었다. 너에 대한 모든 것은 내 손안에 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서 주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사랑합니다. 새벽보다 아침에 가까워진 시간에 갑자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감사함을 굳이 표현해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벅차지만 어쨌거나 글로 전하는 방법 외에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
국뷔 SF 합작: Inter; Galactic Love 참여글입니다. 나의 청춘은 너를 제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 운명은 차라리 나까지 앗아갔어야 했다. 그렇게 내가 무엇도 거스를 수 없게 만든 다음, 그 다음에 너를 데려가야 했다. 너는 운명에 순응했고, 나는 늘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엇갈렸는지도 모...
한 피사체의 바람 - 03 : 소유의 늪 주인이 운명한 뒤, 나는 지하실의 존재가 제법 불편해졌습니다. ‘그것’이 종종 죽어있는 것 같았다고는 해도 분명히 살아있으니 무언가 조치가 필요할 것이 분명했습니다만 내게는 지하실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니까요. 그런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지하실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주인의 지하실...
한 피사체의 바람 - 02 : 불행예찬 내 불행의 역사는 무소유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어쩌면 주인의 불행은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처음 만난 날 주인께서는 내게 다가와 약에 잔뜩 취한 표정으로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을 늘어놓았지요. “나는 태어나서 그런 건 처음, 그...
안녕하세요. 리스포크입니다. 4월 25일이면 제가 글을 쓴 지 2주년입니다. 별것도 아니지만 특별하게 만들어주시는 스푼님들 덕분에 작은 행사 아닌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어요. 바로바로 ... 저와 데이트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싶습니다. 트위터에만 공지했었는데 다른 할 말 있는 김에 여기에 올려봐요. + 그리고 '사랑의 지각변동' ...
이 글은 TRADE 합작으로 몽음님이 주신 Scene - '한 피사체의 바람(posty.pe/amug6f)'의 Complete 버전입니다. 한 피사체의 바람 - 01 : 여행의 끝 “자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 적 있나?” 그것은 제 주인이 제게 처음으로 지하실에 대해 언급한 질문이지요. 나는 내가 아는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사랑해."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깜빡. 깜빡. 깜빡. 깜빡. 주광색의 따스한 불빛이 내 시야를 어지러이 선회하며 점멸했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귓전을 간지럽히더니 이내 소름 끼치도록 빠른 속도로 목덜미를 타고 떨어졌다. 누군가 나의 손을 감싸잡고 있었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들자 새카맣게 암전하는 미약한 빛.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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